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보고 배로 출근을 한다. 여기까지 들으면 ‘어부인가’ 싶다. 출근 전 고객의 요청 사항을 점검하는데, 복숭아 구매 요구도 있고 형광등을 갈아달라는 부탁도 있다. 이걸 보면 심부름센터 직원 같기도 하다. 정작 그가 하는 주요 업무는 각 가정의 전자제품을 고치고 점검하는 것이다. 그는 12년 동안 전남 목포 낙도를 전담하고 있는 삼성전자 서비스맨 김봉식(54)씨다.
김씨는 18일 오전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이제 막 비금도에 내렸다. 원래는 오전 7시40분에 출발해야 하는데 안개가 많이 껴서 이제야 도착했다”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삼성전자서비스 디지털목포센터 소속인 그가 맡고 있는 지역은 전남 목포·신안·진도·무안에 있는 섬 125개. 보통 하루에 접수되는 방문수리 건수는 30건 정도다. 매일 배에 장비를 싣고 수리하러 가는 게 고될 것 같았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인자 익숙혀서 힘든 것은 없는디. 오히려 섬사람들이 순수하고 항시 날 가족 같이 반겨주니까 좋다”며 구수한 사투리를 섞어 답했다. 전남 강진이 고향인 그는 서울의 한 실업고를 졸업한 뒤 1990년 삼성전자서비스에 입사했다. 98년 퇴사해 에어컨 설치기사로 일하다 재입사했고 2008년 외근 엔지니어를 자원했다.
초기에 뱃멀미도 잦고 일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한번 방문하면 고장 난 에어컨은 물론이고 TV, 냉장고, 세탁기 등 모든 제품을 점검하는 베테랑이다. 대부분 고객이 눈이 어두운 어르신이기 때문에 대신 형광등도 갈아주고 말벗도 돼준다. 김씨는 “긍께 삼성 로고가 붙은 전자제품은 기본으로 보고 다른 기업 제품을 봐 드리고 한다”고 했다.
흑산도는 중소업체가 생산한 냉장고에 홍어를 많이 보관한다. 고장이 나면 서비스를 받기가 어렵다. 김씨는 보관을 걱정하는 고객을 위해 전원선 교체 등 간단한 수리를 해준다. 만능 엔지니어인 셈이다. 요즘 같은 여름엔 일이 더 많다. “섬엔 습기가 더 많아 방문 수리 접수 건 수도 3~4배 폭증한다. 지금도 80건이 쌓여 있다”고 했다.
12년 이렇게 섬을 돌아다니다 보니 웬만한 섬에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노년층 고객은 그를 거의 아들로 여기고 동년배는 친구로 대한다. 물품 구입이나 택배 심부름도 종종 한다. 그는 “며칠 전엔 한 어르신이 이가 아프다며 속이 부드러운 복숭아를 사 달라고 하셔서 일하러 가는 길에 사 들고 갔다”고 했다. 거의 식구다.
그는 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매력에 빠져있다. “섬 주민들은 정이 많아 제가 방문하면 수리하기 전에 밥부터 차려 주시고, 수리 후에는 고맙다며 홍어나 전복 등 지역 특산물을 챙겨 주신다”며 웃었다. 1박2일로 갈 경우에는 잠자리를 내주고 배편이 마땅치 않을 때는 자기 어선에 그를 태워주기도 한다.
그는 이런 말을 들을 때 제일 큰 보람을 느낀다. “자네 보고 삼성 꺼 꼭 살라네.” 하지만 움직이는 데 제약이 많은 섬 지역을 엔지니어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날만 해도 그는 목포에서 1시간 거리인 신안 암태남강 선착장으로 이동해 정기선을 타고, 비금도에 도착했고 오후에는 작은 배를 타고 다시 우의도 등으로 이동했다. 부지런히 섬을 다니며 일하는 동안 아들(24)과 딸(21)도 다 자랐다고 했다. 남은 재직 기간의 바람을 물었다.
“제가 떠난 뒤에도 섬 어르신들 찾아갈 젊은 후임자를 구하는 거지라.”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