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시 속 난초처럼 살다간 조선 중기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1563~1589년). 그가 남긴 명시가 발레가 돼 무대를 수놓을 예정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공연을 잠정 중단한 지 6개월 만에 올리는 국립발레단의 레파토리 공연으로 발레 공연서 드문 주체적인 여성의 서사를 깊이 있게 그린다.
국립발레단은 21일부터 사흘간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솔리스트 강효형의 안무작 ‘허난설헌-수월경화(水月鏡花)’를 선보인다. 허난설헌의 시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2017년 초연 당시 한국적 아름다움과 발레의 우아함을 동시에 잡으면서 세련된 모던발레 진수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제 ‘수월경화’는 물에 비친 달, 거울에 비친 꽃이라는 의미인데, 눈으로 볼 수는 있어도 손으로 만질 수는 없다는 뜻으로 허난설헌의 시의 정취가 훌륭해 이루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았다.
강릉 출신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은 천재성을 지니고도 조선시대의 가부장적 위계 사회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여성이다. 엄혹한 시대에서도 신념과 이상을 빼어난 글솜씨로 노래해 중국과 일본 문인들의 극찬을 받았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삶은 예술로 남았다.
이번 공연은 허난설헌이 남긴 많은 시 중 ‘감우(感遇·1장)’와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2장)’을 추상적으로 승화한 작품이다. 안무가 강효형은 특유의 섬세하고 세련된 감성을 바탕으로 1장 ‘감우’에서는 허난설헌의 찬란하고 유복했던 시절을 담고 2장 ‘몽유광상산’에서는 죽음과 가까워지는 고뇌에 찬 말년을 그리면서 그의 삶을 대비했다.
강효형은 특히 무용수의 움직임을 만들면서 허난설헌의 시 속에 등장하는 난초, 바다, 부용꽃, 새 등에 집중했다. 무용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형상화해 아름답고 주옥같았던 그의 시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강효형은 “발레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접목해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 모든 관객이 만족할 수 있는 우리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매료될 수 있도록 안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인(허난설헌)’ 역은 수석무용수 박슬기와 신승원이 번갈아 연기한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춤과 강렬한 군무의 움직임이 역동적이고 현란한 국악과 함께 어우러진다. 특히 ‘난’ 장면이 장관이다. 여자 무용수들이 마치 병풍 앞에서 시를 써 내려 가는 듯한 모습을 표현했다. ‘바다’ 장면은 역동적이고 강렬한 군무가 인상적인데, 허난설헌의 고향인 강릉 앞바다의 파도를 보고 영감을 얻어 안무했다. 그의 죽음을 형상화한 ‘부용꽃’ 장면은 스물일곱 어린 나이에 요절한 짧고 귀한 생을 쓸쓸한 음악과 함께 그려냈다.
초연과 이번 공연의 차별점은 음악과 의상이다. 먼저 국악을 라이브로 즐길 수 있어 귀 호강까지 선사한다. 거문고 연주자 김준영이 음악감독 및 연주에 참여하고, 가야금 거장 고(故) 황병기 명인의 ‘춘설’ ‘하마단’ ‘침향무’ 등은 튼튼한 이음새가 돼 감정선을 연결한다.
의상의 변화도 눈에 띈다. 정윤민 디자이너는 전통적인 관습으로 재능을 펼치지 못했던 허난설헌이 작품에서나마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전통한복의상 디자인을 탈피했다. 실크 오간자, 옥노방, 쉬폰 등 원단을 이용해 무용수의 실루엣을 부각하면서 움직임과 함께 어우러져 선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특히 ‘푸른난새’의 의상은 치마폭을 넓게 제작해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고, ‘바다’ 의상은 강릉 앞바다를 직접 거닐며 파도 소리와 바다 색깔에 착안해 만들었다.
이 공연은 세계의 여러 무대에서도 극찬을 받았다. 2017년 초연 이후 같은 해 6월 콜롬비아 보고타 마요르 극장에서 공연했는데, 국립발레단의 첫 중남미 공연이었다. 그해 9월 캐나다 토론토와 수도 오타와에도 초청됐다.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 수칙에 따라 객석 내 거리두기로 공연을 진행한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