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혐오 문제와 마주했고 그때마다 “주의하겠다”고 했지만 자성(自省)은 없었다. 네이버웹툰에 ‘복학왕’을 연재하는 웹툰 작가 겸 방송인 기안84(김희민·36)의 여성혐오적 시각이 연일 뭇매를 맞고 있다. 일각에서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지만 혐오는 자유로워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이런 콘텐츠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이 모인다.
기안84가 지난 11일 네이버웹툰을 통해 공개한 ‘복학왕’ 304화 광어인간 2화에는 20대 여성 봉지은의 입사기가 그려졌다. 봉지은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학벌, 스펙 그런 레벨의 것이 아닌”이라고 말하며 조개를 배에 올린 뒤 깨부순다. 이후 남성 팀장은 봉지은을 인턴으로 채용하고 “뭐 그렇게 됐어. 내가 나이가 40인데 아직 장가도 못 갔잖아”라고 말했다. 이때 남자 주인공은 “잤어요?”라고 되묻는다. 독자들은 봉지은이 남성 팀장과 성관계 후 채용됐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 아니냐며 기안84의 여성관을 지적했다. 극 중 업무 능력도 떨어지고 태도도 불량한 봉지은이 여성성을 강조한 귀여움을 무기로 빈틈을 메우려 했다는 의미인가.
“미투 운동 조롱이자 여성혐오 집약적 코드”
봉지은이 여성 구직자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비약하고 싶진 않지만 기안84의 묘사에는 분명 혐오의 시각이 담겨 있고 이는 여성의 노력과 성취를 왜곡할 수 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웹툰이 악의적인 것은 고용 및 임금 성차별 문제는 물론 직장 내 성폭력의 엄혹한 현실을 자신의 몸과 젊음을 앞세워온 여성이 모두 다 만들어낸 것이라는 책임전가에 있으며 구조적 불평등의 현실은폐에 있다”고 설명했다.기안84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봉지은이 귀여움으로 승부를 본다는 설정을 추가하면서 이런 사회를 풍자하고 싶었다”며 “봉지은을 해달에 비유하려고 조개를 배에 올렸다”고 해명했다. 그의 말처럼 해달처럼 귀여운 봉지은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진정으로 부적절한 취업 과정을 풍자하고 싶었다면 굳이 조개를 확대해 보여주고 격하게 깨부수는 장면을 삽입할 이유가 없다. 현재로서는 그가 어떤 사회를 어떻게 비판하려고 했는지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없지만 굳이 여성이 성관계를 통해 입사했다는 얄팍한 설정을 추가해 전개해야만 하는 당위성도 부족하다.
윤김 교수는 “20살 넘게 차이 나는 남자 상사와의 성관계로 무능력한 여성이 취업에 단박에 성공했다는 스토리야말로 현재 이 사회를 바꿔나가고 있는 미투 운동에 대한 조롱이자 직접적 공격이며 여성혐오의 집약적 코드”라고 지적했다.
혐오는 빠르게 재생산된다… 관용 안 돼
청와대 국민청원에 ‘복학왕’ 연재 중단을 요청하는 글이 올라오고 그가 출연하는 MBC ‘나 혼자 산다’를 향한 비난 여론이 큰 이유는 기안84가 비슷한 문제를 여러 차례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난해 ‘복학왕’은 동남아인 노동자와 청각장애인 여성을 비하해 거센 비판을 받았다. 비슷한 지적을 수년간 받아왔다면 적어도 독자들의 요구사항을 들여다볼 정성이라도 보여야 했지만 그의 시선에서 사회적 약자는 여전히 혐오의 대상에 불과하고 이 안에 담겼고 주장하는 풍자의 의미는 도무지 읽히질 않는다.수년간 혐오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던 기안84가 점차 예민한 감수성을 습득해가는 과정에서 어쩌다 한 번 실수를 했다면 공분은 이토록 커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혐오는 최근 작품에도 고스란히 묻어있다. 지난 6월 26일부터 올라온 기안84의 웹툰 ‘회춘’의 ‘대학생 아빠’ 시리즈에는 ‘나 혼자 산다’ 출연진 이름을 딴 캐릭터가 등장한다. 특히 전현무의 이름을 딴 전헌무와 화사의 이름에서 가져 온 지화사가 문제다(지난달 17일 전헌무는 최삽질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화사는 그대로다).
논란이 된 장면은 지난 7일 올라온 작품이다. 최삽질(전헌무)은 여성이 접대하는 술집에 방문했는데 이때 그의 방에 들어온 여성 종업원이 지화사였다. 최삽질이 “화사야 힘들지? 오빠가 돈 벌어서 일 그만두게 해줄게. 조금만 참아”라고 말하자 지화사는 “여기서 일하니까 내가 오빠를 만나지, 밖이었음 내가 오빠 만났으려나? 나 만나고 싶어? 그럼 100억 줘”라고 답했다. 동료의 이름을 딴 캐릭터를 성접대 여성과 룸살롱에 방문하는 남성으로 그리면서 그의 세계관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거센 상황이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시대 변화 작품에 반영해야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텍 교수는 “웹툰을 둘러싼 논란은 수위가 아닌 소재의 문제”라며 “지금의 독자들은 감수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 작품에 변화한 사회상을 반영해달라는 요구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기안84의 작품이 B급 감성을 자극하면서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혐오 표현은 그가 지향하는 마이너한 코드와는 분명 달라야 한다. 그가 살아보지 못했던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여성의 삶을 표현할 때는 적어도 이들의 사회에 놓인 위치와 현재 위상의 변화, 이들이 주장하는 것과 바꾸고 싶어하는 세상의 모습을 들여다 봐야 했고 그랬다면 작품을 통해 표출될 혐오적 시각과 묘사의 위해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 약자의 모습은 오로지 기안84의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경제적 빈곤 정도로 인간의 계급을 나누는 행태, 신체적 불편함을 유머 코드로 활용하는 그의 시선은 첫 논란이 불거졌던 그때도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윤김 교수는 “젊은 몸을 자원 삼아 손쉽게 살아가는 ‘김치녀’와 ‘보슬아치’에 대한 망상에 기초해 웹툰을 생산해내는 기안84의 세계관은 2010년대 초 일베(일간베스트)가 탄생하던 시점에서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질 못했다”며 “빛바랜 여성혐오 코드를 재미와 유머로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논쟁이 표현의 자유를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지금의 목소리를 악성 댓글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혐오는 표현의 자유의 범주에 속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기 있는 작품에서 지속해서 사회적 약자를 혐오 프레임에 가둔 채 밀고 나가는 상황을 개인적인 호불호의 문제로 깎아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웹툰 속 캐릭터 절대다수와 독자층 대부분이 청소년인 점을 고려한다면 웹툰이 지니는 교육적인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