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광복절 경축식 파행…‘친일 청산’에 골난 원희룡 제주지사

입력 2020-08-16 13:12 수정 2020-08-18 09:52
원희룡 제주지사는 15일 오전 제주시 조천체육관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에 유감을 표명했다. 제주도 제공

중앙 정치권의 ‘친일파 국립묘지 파묘(破墓)’ 논란이 제75주년 광복절이던 15일 제주에도 옮겨붙었다.

“민족을 외면한 세력이 보수라고 자처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고 한 김원웅 광복회 중앙회장의 대독 기념사에 대해 원희룡 제주지사가 예정에 없던 즉석연설로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서면서다.

원 지사는 “앞으로도 이런 식의 기념사를 또 보낸다면 광복절 경축식의 모든 행정 집행을 원점에서 검토하겠다”며 경축식 지원 중단을 경고했다.

이 같은 원 지사의 발언과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를 놓고 휴일인 16일에도 제주와 중앙 정치권에서는 여야 간 이념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광복회장 “민족 외면한 세력이 ‘보수’ 운운은 대한민국뿐”

15일 오전 제주시 조천체육관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친일’에 대한 역사적 판단을 두고 고성이 오가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발단은 김원웅 광복회 중앙회장의 기념사였다.

김률근 광복회 제주도지부장이 대독한 기념사에서 김원웅 중앙회장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가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채 성장해 온 문제점을 지적했다.

김원웅 회장은 “이승만이 집권해 국군을 창설하던 초대 육군참모총장부터 21대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며 “이들 민족반역자들이 국무총리 국회의장 장관 국회의원 국영기업체 사장 해외공관 대사 등 국가 요직을 맡아 한평생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에서 민족을 외면한 세력이 보수라고 자처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고 했다.

또, 최근 작고한 백선엽 장군을 지칭한 듯 “서울현충원 가장 명당자리에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자가 묻혀 있다”며 “(그는)해방후 미국에 다시 빌붙어 육군참모총장과 장관을 지낸 자”라고 했다.

같은 자리에서 김원웅 회장의 기념사를 들은 원희룡 제주지사는 미리 준비한 경축사 원고를 읽는 대신 김원웅 회장의 기념사를 반박하는 즉석연설을 시작했다.

원 지사는 강한 유감을 표했다.

그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편향된 역사만이 들어가 있는 이야기를 기념사라고 광복회 제주지부장에게 대독하게 만든 이 처사에 대해 매우 유감”이라며 “제주도지사로서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밝힌다”고 했다.

원 지사는 “태어나 보니 일본 식민지였고 식민지의 신민으로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없는 인생경로를 살았던 많은 사람이 있다”며 “비록 모두가 독립운동에 나서지 못했지만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갔던 게 죄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 군대에 복무했던 분들도 있지만 한국 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그 공도 있다”며 “그분들의 공과 과를 겸허하게 우리가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원 지사는 이어 “지금 75주년 맞은 광복절에 역사의 한 시기에 이편저편 나누어서 하나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단죄되어야 하는 그런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조각내고 우리 국민을 다시 편 가르기 하는 시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며 “앞으로 이런 식의 기념사를 또 보낸다면 저희는 광복절 경축식의 모든 행정 집행을 원점에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원 지사의 즉석연설이 끝나자 현장에서는 참석자들 사이에서 고성이 오갔다.

‘친일파 국립묘지 파묘법’ 개정 앞두고 여야 대립
제주를 포함한 이번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 파행은 친일 행위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 특히 정치권의 선명한 시각차를 수면위로 끌어올렸다.

지난달 10일 백선엽 장군 별세 후 그의 공과를 놓고 현충원 안장 논란이 벌어졌고, 지난 11일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금지하고 유골(시신)을 이장할 수 있도록 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면서 친일 행위를 둘러싼 공방이 거세진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13일 국립묘지법 개정안 공청회를 열어 이른바 ‘친일파 파묘법’에 대한 추진 의지를 드러낸 상황에서 광복회 중앙회장이 강한 어조가 담긴 광복절 기념사를 내놓으면서 야권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실제 김원웅 광복회장 기념사에는 “지난 21대 총선 전 광복회가 국회의원 후보 1109명 전원에게 ‘국립묘지에 묻힌 친일 반민족 인사 묘지에 친일행적비를 세우는 국립묘지법 개정안 찬반’을 질의한 결과 지역구 당선자 총 253명 중 3분의 2가 넘는 190명이 찬성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원 지사는 그간 친일 행적을 비판하는 학계와 정치권 행보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는 앞서 ‘백선엽 장군 현충원 안장 논란’ 당시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백 장군님은 6·25전쟁 영웅으로 자유대한민국을 구한 분이고 ‘6·25의 이순신’이라고 평가해도 될 것”이라며 백 장군의 서울 현충원 안장을 강력히 주장했다. ‘과’보다 ‘공’을 우선시하고 그 판단은 후대의 역사적 판단에 맡기자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여기에 김원웅 광복회장이 대한민국 보수의 실체를 비판하는 발언을 기념사에 포함하자 보수계 정치인으로서의 견해를 담아 돌발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與 “친일청산이 왜 불편한가” VS 野 “사회갈등 자초”…“모두 정치인들 말잔치” 지적도

‘제2의 백선엽 사태’로 이름 지어지는 이번 광복절 경축식 파행을 두고 휴일인 16일에도 정치권의 공방은 거세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제주도당은 이날 오전 논평을 내고 “광복절 경축식마저도 자신의 이슈몰이를 위해 이용하는 원 지사의 안하무인적인 태도에 제주도민과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제주녹색당은 “작은 정치인은 갈등을 키워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며 “도민으로서 부끄럽다”고 꼬집었다. ‘앞으로 광복절 경축식에 모든 계획과 행정집행을 원점에서 검토할 수 있다’고 한 원 지사의 발언을 두고는 “알량한 권력으로 협박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중앙 정치권의 논쟁도 격렬하다.

미래통합당 의원들은 ‘친일 청산’을 주장하는 김원웅 광복회장의 파직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기현 통합당 의원은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깜냥도 안 되는 광복회장의 망나니짓에 광복절 기념식이 퇴색돼 안타깝고 아쉽다”며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세워 자신의 배를 채운 민주당 윤미향 의원 같은 사람도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디에 대고 친일청산 운운하냐”고 적었다.

허은아 통합당 의원은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장 김여정 입에서 나올법한 메시지”라며 “정권 지지율이 떨어지니 ‘반일 장사’를 하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같은 날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개인 성명으로 가세했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은 분명한 국가목표가 안 보인다”며 “이는 이념편향·진영 중심의 국정 운영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이 쌓였고, 이에 따른 국민적 분열과 사회갈등이 국력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자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불과 3주 만에 국가 통합의 꿈을 접겠다고 물러서셨던 분이, 정부가 우리 사회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지난 3년간은 특별한 말씀이 없으시다가 최근 들어 정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시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소병훈 한병도 유기홍 황희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를 놓고 미래통합당의 비판이 계속되자 “통합당은 친일 청산이 불편한 것이냐. 친일 청산을 하자는 주장 어디에서 모욕을 느끼느냐”고 지적했다.

이처럼 광복절 기념식이 정치인들의 말 잔치로 얼룩지면서 민족의 경축일인 광복절의 숭고한 의미가 퇴색됐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한편 故 백선엽 장군은 6.25 당시 한국군 승리에 큰 공을 세웠지만 광복 전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만주군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한 이력 때문에 지난 2009년 정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됐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