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청부살인’ 교사범 “제3의 범인 있다”…法 “근거 없다”

입력 2020-08-14 17:03 수정 2020-08-14 17:14

‘필리핀 청부살인 사건’의 교사범들이 1심에서 검찰 구형보다 가중된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제3의 범인이 고용한 킬러에 의한 범행 가능성”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4부(부장판사 허선아)는 14일 살인교사 혐의로 기소된 김모(56)씨와 권모(55)씨에게 각각 징역 22년과 19년을 선고했다. 앞서 검찰은 이들에게 각각 징역 18년과 12년을 구형했었다. 재판부가 검찰 구형보다 높은 형을 선고한 것이다.

김씨 등은 2015년 9월 17일 필리핀 앙헬레스시티에서 사업가 박모(당시 61세)가 현지 ‘킬러’에 의해 살해 당한 사건의 배후로 지목됐다. 정체불명의 괴한은 당시 박씨의 부동산 사무실을 찾아 “누가 미스터 박이냐”고 물었고, 박씨가 “내가 미스터 박”이라 답하자마자 다섯 발의 총탄을 발사해 숨지게 한 뒤 달아났다. 박씨에 대한 살인교사 혐의를 받는 김씨와 권씨는 사건 4년 만인 지난 2월 재판에 넘겨졌다.

이날 재판부는 김씨 등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권씨에 대해 “피해자와 아무런 개인적 관계가 없는데도 오로지 경제적 이득을 위해 범행을 저질러 비난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김씨에 대해서는 “피해자 살해의 원류(源流)임에도 반성하지 않고 책임을 부인하면서 납득할 수 없는 변명으로 일관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장기간 범행을 계획했고 거액의 대금으로 적발되기 어려운 킬러를 고용해 사건 실체를 영원히 미궁에 빠질 수 있게 시도했다”고 질타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김씨는 필리핀에서 박씨가 운영하는 호텔에 5억원을 투자했는데, 투자 이후 홀대를 받고 모욕적 언사를 들으면서 박씨를 살해할 마음을 품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김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업가 권씨와 범행을 모의했다고 한다. 김씨는 권씨에게 “킬러를 구해주면 호텔식당 운영권을 주거나 5억원을 주겠다”면서 살인을 의뢰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후 권씨는 자신과 가까운 필리핀인 A씨에게 킬러 소개를 부탁한 것으로 전해졌다. 권씨는 김씨에게 착수금으로 100만 페소(약 2500만원)를 받아 전달했다. 권씨는 이후 A씨를 만나 “박씨를 살해하면 400만 페소(약 1억원)를 주겠다”고 했다. 결국 김씨에서 권씨, 권씨에서 A씨를 거쳐 성명불상의 킬러에게 살인의뢰가 전달됐다는 게 경찰의 수사 결과다.

김씨와 권씨 측은 재판 내내 무죄를 주장했다. 김씨는 박씨가 죽으면 손해를 보게 되므로 살인동기가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다른 피고인 권씨가 수사·재판 과정에서 김씨에 대해 “박씨를 죽이고 싶다고 자주 얘기했다”거나 “돈보다도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고 했다”고 진술한 것을 근거로 김씨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씨와 권씨는 “다른 제3의 범인이 고용한 킬러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필리핀 수사 당국이 박씨의 살인 용의자를 특정해 재판에 넘긴 것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용의자 일부는 박씨에 대한 살인교사 시점인 2015년 9월 14일 출입국 기록상 필리핀이 아니라 한국에 있던 것으로 확인됐고, 범행 현장의 CCTV 영상과 필리핀 수사당국이 확보한 목격자 진술이 불일치하는 점 등을 근거로 “제3의 교사범을 전제로 하는 필리핀 현지의 수사자료는 신뢰성 높은 자료로 판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