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등장하자 ‘위키피디아 편집 전쟁’…미국판 진영 대결

입력 2020-08-15 06:30
지난 11일(현지시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된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 AP연합뉴스

지난 11일(현지시간)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은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됐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고 4분 뒤 영문 위키피디아의 ‘해리스’ 문서에는 그녀가 바이든의 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는 사실이 반영됐다.

문서를 수정한 유저(닉네임 ‘즈비콘’)는 자신을 스포츠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스라엘 10대라고 소개하며 “내가 위키피디아 문서를 수정하는 이유는 지구상 모든 사람들이 축적된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라며 “위키 편집은 가짜뉴스에 노출되지 않고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매우 중요해졌다”고 적었다.

하지만 즈비콘이 수정을 마치자마자 문서에서는 ‘편집 전쟁’이 벌어졌다. 주제는 다양했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비롯한 악의적인 편집이 무수히 가해졌다. 특히 해리스의 출생 문제에 대한 ‘버더(birther)’ 논란이 재점화됐다. 버더는 오바마 전 대통령이 케냐 출생이므로 미국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해리스가 흑인이라는 점을 겨냥한 공격이다.

미 인터넷매체 ‘애틀랜틱’은 13일(현지시간) 이같은 내용을 보도하며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08년 대선 당시 겪었던 ‘출생지 논란’이 위키피디아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흑인이자 외국인인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 정치에 관여하기 위해 모종의 수법으로 출생지를 조작했다는 허위 주장이 반복적으로 제기됐다.

애틀랜틱은 해리스 의원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직후 그녀를 다룬 문서에 가해진 수정을 베테랑 유저들에 의한 ‘구조적 정비’로 평가했다. 출처 명시, 주석 개선, 항목 분류 등 정상적인 범주 내에서 문서가 보완되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해리스가 지명된 지 28분 만인 4시42분에 문서에 대한 첫 공격이 시작됐다. ‘Eee302’라는 닉네임의 유저는 문서에 등록된 해리스의 이름을 ‘카멀라(Kamala)’에서 “쿤탈라(Cuntala)’로 수정했다. 마침 문서를 살펴보던 다른 유저가 이를 발견하고 2분 만에 이전 버전으로 문서를 되돌렸지만, 이미 ‘쿤탈라 해리스’라는 이름은 구글의 상위 검색어 목록에 오른 뒤였다.

이어 해리스 문서에는 곧 ‘토론’ 항목이 개설됐다. 토론의 핵심 주제는 ‘카멀라 해리스는 진짜 아프리카계 미국인인가’였다. 애틀랜틱은 “해리스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자메이카계 도널드 해리스와 인도계 샤말라 고팔란의 딸로 태어났다”면서 “일부 사람들은 오바마와 마찬가지로 해리스가 혼혈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녀가 ‘진짜 흑인’이라는 점을 의심했다”고 지적했다.

해리스를 향한 공격에는 언론도 가세했다. 미 보수매체 폭스뉴스의 터커 칼슨은 해리스의 이름인 카멀라를 ‘카메라’ ‘카밀라’ 등으로 의도적으로 틀리게 부르며 비꼬았다. 뉴스위크는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해리스가 부통령 출마 자격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제도권 언론까지 끼어든 ‘출생지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 위키피디아 유저는 “남아시아계 조상을 가진 해리스가 어떻게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분류될 수 있냐”면서 “이는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모욕을 주는 발언”이라고 주장했다.

위키피디아 운영진은 수많은 신문 기사와 공식 서류를 바탕으로 해리스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임이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현재 ‘보호 모드’로 설정된 해당 문서는 임의 수정이 불가능하지만 여전히 위키피디아에서는 그녀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익명 글이 수없이 올라오고 있다.

애틀랜틱은 “수많은 자정 작용에도 불구하고 해리스의 정체성을 ‘비(非)미국화’ 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