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입력 2020-08-15 11:00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36절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2~36)

우리는 오늘을 광복 75주년 기념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어떻게 광복이 될 수 있었는지, 갑작스레 맞이한 해방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광복의 때를 맞이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세계는 크게 네 가지 유형의 정치체제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최초의 정치 유형인 왕정주의, 두 번째는 절대왕정의 틈바구니에서 개신교 국가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자리 잡았던 입헌군주제, 셋째는 역사적인 정치체계가 없이 건국된 미국에서 성경을 바탕으로 발전되고 있었던 자유민주주의, 마지막으로 천재적인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만들어진 공산주의로 러시아에서 자리 잡은 이후 새로운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당시 지성인들에게 매혹적인 정치이념으로 추앙받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왕조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왕조는 단절이 되었고 일종의 국가, 사회적 신분제도였던 반상 제도도 거의 모습을 감췄습니다. 그러다 광복을 맞았습니다. 바로 그 상태에서 어떤 체제를 선택해야 하는지에 관한 숙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선택할 수 있었던 정치체제의 두 유형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였습니다. 당시 세계의 흐름에 따라서 남쪽은 자유민주주의를, 북쪽은 공산주의를 선택함으로 한반도에 2개의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1948년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날입니다. 광복 이후의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체제를 선택하고 나라가 세워질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며 만든 헌법 전문은, 지금 글을 쓴다고 해도 명문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대한민국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자유의 진정한 개념과 가치도 잘 모른 채 시작된 나라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중,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적인 침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큰 위기와 혼란을 맞게 됩니다. 3일 만에 서울 함락, 한 달여 만에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에 망연자실하고 있을 그때, 교회는 나라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유엔의 지원결의가 결정되었고 유엔 21개국은 6·25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이들이 한국에 온 이유는 오직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계의 16개 국가 196만 명의 젊은 군인들이 이 땅에서 싸웠고, 6개국에서 의료지원단이 파견되었습니다. 40여 개국이 물자를 지원하고, 유엔군은 피난민 구호사업, 의료시설, 교육시설 및 전후복구를 지원 등을 담당했습니다. 전쟁에 말할 수 없이 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한국군 약 13만7800명, 미군 3만6940명, 유엔군 3,730명 이상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종자와 포로는 약 9930여 명입니다. 외국에서, 그것도 역사에 아무런 기여도 없는 조그마한 신생국가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와서 피를 흘렸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위기 속에서도 계속해서 같은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십니까? 우리는 때로 너무 흥청망청, 생각 없이 살았습니다. 미합중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라 불리는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는 연설을 통해 그가 독립전쟁을 해야 하는 당위성을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모인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도 없이 우리를 위해 싸우다 죽기까지 하며 지켜준 자유입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고 목숨을 다해 싸워가며 지켜온 이 자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느 날 제가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자유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떨기나무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출애굽기의 한 장면입니다.

“모세야,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내 백성에게로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어라.” 세는 말합니다. “저는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 아론을 데리고 가라.”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우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보내셨다 하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라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출 3:14) 스스로 자(自)에 말미암을 유(由)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자유였습니다. 이어서 말씀합니다.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5)

이 말씀을 깨닫고 제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것은 선행을 많이 하는 것, 참을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성품적인 변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며 더 깊이 묵상하니‘자유’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자유자십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입니다. 그 자유자 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빚으시며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무엇이든지 창의적인 생각으로 만드시고 행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사람을 만드실 때 자신의 형상인 자유를 가장 깊은 곳에 두고 만드셨습니다.

성경의 자유라는 단어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 죄악의 속박에서 풀어주신 자유, 둘째, 사랑하는 자유, 셋째, 무엇이든지 하라는 자유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렇게 무엇이든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자유의 참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라면, 우리 인생의 자유는 그 하나님을 의존하는 의존적인 자유입니다. 영생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자존적 영생을 가지신 분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의존적인 영생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의지해서’ 얻어지는 영원한 삶입니다. 자유가 그러합니다. 하나님 그분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유에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며, 단 한 가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명령의 의미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존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선악과에 어떠한 마술적인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인생의 헛되고 헛됨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사람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라고 했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친구끼리의 사랑을 우정이라 하고, 남녀 간의 사랑을 애정이라 하며,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효도라고 합니다. 질서에 따라 표현하는 말이 다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경외한다고 합니다. 너무 크고 엄위로우신(Great and Glorious) 그분 앞에 사람은 일종의 두려움을 갖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어르신을 만나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조심함과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경외한다는 구체적인 실재는 무엇입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본분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든 사람이 부여하는 것입니다. 쇠붙이에 하늘을 나는 본분이 주어지면 비행기가 됩니다. 본분을 주니 배가 철임에도 불구하고 물 위를 떠다닐 수 있습니다. 물속을 다니는 본분이 주어지면 잠수함이 되고, 도로 위를 다니는 본분을 주니 자동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본분에는 기차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본분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인 CS 루이스는 자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실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아마 자유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것은 하나님마저도 반역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아담은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결국 무서운 저주를 받았습니다. 자유에 반드시 따르는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법’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생은 버림받습니다. 죄를 범한 인생들이 깊은 죄악에서 신음하고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이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신 다음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탄의 모든 시험을 이기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며 가장 중요하게 선포하신 것이 바로 자유였습니다. 구속(救贖)의 정점은 바로 자유였습니다. 3년간의 모든 사역을 끝마치실 즈음에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을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자신들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자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라고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역 전체가 우리를 죄의 결박에서 풀고 하나님 자녀의 자유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혹시 자유보다 더 좋은 개념이 세상에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이를테면 ‘사랑’, 만약 자유 의지 없이 사랑만 있다면 그것이 사랑일 수 있겠습니까? ‘평화’, 평화는 올바른 관계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무주공산 같은 것이 평화입니까? 올바른 관계는 자유로운 생각들이 귀하게 만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면 ‘정의’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자유가 없다면 ‘거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평등’, 자유가 없는 평등의 종착역은 아마도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Big Brother)를 내세운 극단적인 국가의 모습과 비슷할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세상의 가장 소중한 개념은 자유입니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 되게 만드는 개념의 소중한 시작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6·25를 지나온 지금, 하나님께서 얼마나 엄청난 자유를 주셨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전쟁 후에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세월이 있었습니다. 건국의 중심개념이었던 자유가 6·25를 맞아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질 뻔한 위기도 있었고, 그 후에 자유로운 삶의 영위가 정착되지 못한 채 혼란의 시기가 계속되었었습니다. 그때마다 뜻있는 사람들이 바른 자유의 틀을 이 땅에 확립하기 위해 많은 대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이 나라가 진정 모든 독재로부터 온전히 벗어난 시점은 약 3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흔히 반만년의 역사라고 하는데, 이제 겨우 30년 동안 자유가 무엇인지 알고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축복을 우리 시대에 누렸다면, 우리 후손에게 이 자유를 잘 넘겨주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것보다도 귀한 축복일 것입니다. 세상의 유형과 무형의 어떤 자원보다도 자유가 주는 창의성, 그보다 더 큰 자원은 없습니다.

대략 20년 전,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의 재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로 평가받으며 총리의 경제 자문을 담당했던 독일의 경제학자 헤르베르트 기르시(Herbert Giersch)와 한국의 경제학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한 교수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시대가 오지 않겠습니까?’ 세계의 모든 학자가 이와 같은 전망을 할 때였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아마도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유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통적인 제약이 많으므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양은 자유 안에서부터 나오는 창의력이 여전히 많이 부족합니다. 이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미국의 시대는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한없이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에 자원이 풍부한 국가치고 제대로 잘 사는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창의성을 넘어서는 보물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로운 창의성 덕분에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함께 세계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천 년 역사에서, 기껏 30년간의 자유를 우리만 누린 채 물려주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자유를 우리들은 이 땅에 살면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자녀들을 두고 우리는 언젠가 이 땅을 떠나게 됩니다. 아무리 많이 견고하게 쌓아두어도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에 이뤄질 수 있습니다. 조그마한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딜 갈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또 누군가와 약속을 하려면 그 자체로 실례가 아닐까 수그리게 됩니다. 자유롭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요즘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는 엄청난 노력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유일하게 전쟁을 치르고서도 자유민주주의를 확립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개인의 자유와 그 자유를 책임지는 자유민주주의가 계속 이어지도록 마땅히 기도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자유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철학이나 체제에서도 자유의 중요함을 강조한 문화나 국가는 없었습니다. 동양의 사서삼경에 자유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슬람에도 힌두교나 불교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자유라는 말이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 쓰이면, 구속이나 속박 따위가 없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며, 말 그대로 남용하는 사람은 자칫 버르장머리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자유주의자라고 하면 그렇게 탄압과 멸시를 받습니다.

이것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자유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1939년 개역 성경을 내기 전까지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놓아주리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어떤 억압에서 놓아 지는 것을 자유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그런 뜻이 아닌, ‘무엇이든지 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네 생각을 펼치고, 무엇이든 네가 수고하고 애쓰며 좋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마지막 판단은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온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바른길이라는 말입니다.

1939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씀에 처음으로 자유라는 단어가 적혔습니다. 동양에 아직 자유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서양 고전을 번역하기도 했는데 그때 가장 번역하기 어려웠던 단어가 자유였다고 합니다. 그때 처음 들어온 개념입니다.

자유라는 단어, 지금 우리가 흔히 쓰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이름인 줄을 제가 팔십이 다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주께서 이런 엄청난 자유를, 악에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적극적인 인생, 다만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여 그를 위해 기도하는 적극적인 인생을 사는 데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는 자유를 굳게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의 멍에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그 자유를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왕을 세우는 것을 정말 싫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 진정한 다스림이라고 생각하시어 사람 위에 군림하는 왕제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처음 입성하여 사사, 곧 재판관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판단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국가 제도 안에 사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웃 국가들이 모두 왕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거듭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참된 왕이셨지만 그들은 현실의 왕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았던 사무엘은 슬퍼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거듭거듭 요청하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탕자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마지못해 허락한 아버지처럼 이스라엘에 왕의 제도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을 대신하려 했던 왕들의 우스꽝스러웠던 모습을 세계의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종의 멍에를 매지 않기 위해서는 자유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Stand Firm’ 내 앞에 달려드는 적을 향해서 진지를 물러서지 않은 채 전신갑주를 입고 대항하는 것이 바로 ‘Stand Firm’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와 평화는 지키는 자의 것이지, 염원하는 자의 것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이 자유를 날마다 행할 때, 예수님께서 자유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갈 5:13)

육신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충동이 지배하고 사람의 생각에 매여서 주장하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유가 주어지면 충동으로 행합니다. 이것이 정말 주님의 뜻인지 알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삶을 회개할 때, 여유만 있으면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 모습과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모습이 떠오르고 그때마다 부끄러워서 용서해달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울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믿음으로 또 할 뿐입니다.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먹음직하고 보암직해서 하나님을 떠났던 아담과 이브의 길을 좇지 말라는 말입니다.

가장 귀하게 행해야 할 것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말씀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종노릇하셨습니다. 세계 곳곳의 재난지역을 가보면, 목숨을 걸고 구호 활동을 하시는 분의 90%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께서 이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유와 책임이 이 땅에 굳건히 세워지도록 살아내야 하고, 또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광복 75주년, 우리는 이 나라가 자유와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지는 국가가 되기를, 개인의 삶에서 자유에 대한 책임이 아름답게 펼쳐지게 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은혜가 오늘 이 예배 안에, 우리 심령 가운데에 넘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남서울은혜교회(박완철 목사)는 회복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예수 사랑으로 나를 회복하고 이웃과 세상을 회복시키는 가족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