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나 지금 죽을 것 같아. 이비인후과 가려고 했는데 거기 휴가래 오늘.”
모자를 코까지 눌러쓴 여성이 약국 문을 밀고 들어왔다. 여성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손님을 받아내느라 4주 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미선(59) 약사는 익숙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여성의 안색을 살피고는 영양제 몇 봉지를 내밀었다. “아이고야 몸이 완전히 바닥을 치고 있네. 짬짬이 좀 쉬어줘야지 이게 뭐야. 일단 내가 약을 하루치만 줘 볼게.”
서울 하월곡동에 있는 집창촌 ‘미아리 텍사스’ 여성들은 몸이 아플 때면 병원보다 이미선 약사를 먼저 찾는다. 병원에서 직업을 밝혔을 때 쏟아지는 눈길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씨가 20년 넘게 ‘동네 주치의’로 활동해온 터라 일일이 지병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씨가 치료하는 건 몸의 병만이 아니다. 이씨의 ‘건강한 약국’은 1996년부터 24년간 동네 상담소 역할을 해 왔다. 이씨는 몸이 아파 약국을 찾은 성매매 여성들에게 따듯한 위로를 건넸고, 8평 남짓한 약국은 마음 둘 곳 없는 이들에게 도피처가 되었다. 이씨가 약사님 대신 ‘이모’로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씨는 2012년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따고 본격적으로 무료 복지 상담을 시작했다. 스토리 펀딩으로 후원금을 모아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에게 나눠주고 미혼모 가정을 정기적으로 후원하기도 한다.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자활을 돕는 비영리 단체 ‘바하밥집’을 후원한 지는 10년이 넘었다.
국민일보는 6일 건강한 약국을 찾아 이미선 약사를 만나 선행의 이유를 물었다. “누군가 완벽한 내 편이 되어주면 좋잖아요. 엄마 아빠처럼. 약자들의 편이 되어주고 싶어요. 그게 즐겁고요.”
내 고향, 미아리 텍사스
이씨는 미아리 텍사스 토박이다. 이씨가 열 살쯤 되던 1960년대 말, 서울의 대표적 집창촌이던 양구와 종로3가 업소들이 없어지면서 성매매 여성들이 하월곡동 근처로 몰려들었고, 미아리 텍사스가 만들어졌다.
이후 그는 숙명여대 약학과 80학번으로 입학해 젊은 시절을 학생운동에 바쳤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붙잡혀 공주교도소에 8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1986년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만난 남편과 가정을 꾸렸으나 몇 년 뒤 이혼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미아리 텍사스는 그대로였지만 이씨의 인생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들이 생겼고 이혼 이후 생긴 빚은 그를 신용불량자로 만들었다. “빚을 갚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어요. 하루에 스무 시간 이상 일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저 살기 바빠서 여유가 없었어요. 지금처럼 여기 애들과 관계를 맺고 봉사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피임약 오늘 먹으면 피임 되는 거 맞나요?”
이씨의 인생을 바꾼 건 한 아이였다. 약국을 개업한 지 몇 년 후, 쭈뼛대며 약국 문을 밀고 들어온 아이는 어색한 목소리로 피임약을 주문했다. 짙은 화장이 감추지 못한 보송보송한 솜털은 아이의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미성년자였어요. 18살쯤 되어 보이는. 저한테 ‘이 약 오늘 먹으면 오늘 피임이 되는 것 맞냐’고 물어봤어요. 가까이서 보니까 긴장했는지 솜털이 바짝 서 있더라고요.”
이씨가 느낀 것은 분노였다. 꽃봉오리 같은 아이를 소주 찌든 냄새로 가득한 골목으로 밀어 넣은 사회가 원망스러웠다. 이씨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너의 잘못 때문이 아니야. 혼자서 오롯이 다 짊어져야 하는 잘못은 없어. 꼭 살아남아서 제발 세상으로 건강히 나가거라.”
이날부터 이씨는 ‘약사 선생님’에서 ‘이모’가 됐다. 약봉지와 함께 건너는 진심 어린 걱정은 미아리 텍사스 주민들의 마음을 열기에 충분했다. 약을 사러 오는 손님보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주민이 더 많은 날도 있었다. “동네 사랑방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다들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으며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거죠.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애들이 정말 많아요. 맞고 사는 애들, 힘들게 번 돈을 애먼 데 쓰는 애들…. 그 아이들이 나이가 들면 그때 또 삶이 얼마나 곤궁해지고 피폐해질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참 마음이 아파요.”
부활절에 떠난 아기 엄마, 복지사 이미선을 만들다
이씨는 2005년 부활절을 잊지 못한다. “교회에 있었는데, 우리 약국 쪽에서 연기가 올라온다고 해서 뛰어갔어요. 앞 건물 2층 3층에서 불이 났더라고요. 119가 와서 불을 끄고 정신이 없었어요. 구급대원들이 뭘 들고 나오길래 보니까 시신이었어요. 여기 애들.”
화마가 뱉어낸 시신은 초등학생 크기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몸의 수분을 다 뺏어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랑 수다를 잘 떨었던 아기 엄마였어요. 애 아빠가 가정폭력을 일삼아서 헤어졌는데, 딸을 데리고 나오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여기 온 거였어요. 자기가 고아로 자라서 자기 딸만큼은 고아로 키우고 싶지 않다고. 근데 보름 만에 죽은 거죠. 그런데 며칠 이따가 그 남편이 합동 장례식에 영정 사진을 들고 왔더라고요. 위자료 받으려고. 화가 나서 막 싸웠어요. 그때 확실히 느꼈죠. 이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내편’이 필요하겠구나. 그래서 그들의 편을 먹기로 한 거예요.”
이씨는 2012년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땄다.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에게 전문적인 상담을 해 주고 싶어서였다. 후원금 모집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2016년에는 포털사이트 스토리 펀딩으로 1000만원을 모아 봉사 활동에 쓰는가 하면 숙대 약대 동문회와 약사 단체 카톡방 등을 돌며 지인들에게 기부 독려 글을 쓰기도 한다. “이번에는 여성 질 유산균을 기부받았어요. 되게 좋은 건데 한 500만원어치 받았어요. 다 나눠주고 몇 개 안 남아서 며칠 전에 회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또 보내주신다고 하더라고요.”
미아리 텍사스의 끝에서
미아리 텍사스는 지난 3월 재개발 관련 환경영향평가 심의 통과를 기점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정비업계에 따르면 이르면 2023년부터 이곳에는 아파트와 호텔, 오피스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씨는 재개발에 밀려날 이곳 여성들이 걱정이다.
“여기에 십년 이상 있다 보면 세상을 모르게 돼요. 바깥 생활을 안 하다 보니까 감각이 둔해지는 거죠. 쉽게 말하면 사회적 관계를 맺는 법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어떤 애는 은행 거래도 안 해요. 은행이 무섭다고. 그래서 현금 보따리를 들고 다녀요. 이런 애들은 사회로 나가면 살아낼 수가 없는 거죠.
마음에 상처가 있는 친구들도 너무 많아요. 자존감이 낮아서 스스로를 너무 비하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손목이 보이잖아요. 열에 일곱은 주저흔이 있어요. 커터칼로 그은 상처들. 나를 봐달라는 거죠. 살려달라고. 이렇게 상처 많은 친구들이 사회로 나가서 잘 살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이씨는 미아리 텍사스가 사라지는 날까지 이들을 도울 예정이다. “사람들이 다 더럽다, 불결하다 손가락질하는 성매매 집창촌이 나에게는 고향이에요. 세상 모두가 여기 친구들한테 돌을 던지고 있지만 누구 하나는 전적으로 저들의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들이, 우리 딸이 잘못했다고 내치지는 않잖아요. 남은 시간이 3년이 됐든 5년이 됐든 기부도 계속하고 상담도 할 거예요. 제가 가진 것들 잘 나눠주고 싶어요. 남은 후회 없게요.”
이홍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