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삼식 “기억하는 작업, 작가적 반성에서 나와”

입력 2020-08-10 16:33
연극 ‘화전가’의 배삼식 작가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 마련된 국립극단 창단 70주년 기념 전시 ‘연극의 얼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20여년간 배 작가는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배우들과 함께 시대를 아우르는 통찰력 있는 작품을 선보이며 사랑받았다. 윤성호 기자


“‘현재’를 이해하려면 ‘기억’을 구체적인 형상의 형태로 가지고 있는 게 중요해요. 2010년대 초반부터 작가로서 우리의 뿌리를 너무 모른다는 자괴감과 막막함이 밀려오더군요. 그때부터 관념적인 역사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목소리를 전하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최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배삼식(50) 작가는 오는 23일까지 공연되는 ‘화전가’의 창작 계기를 이렇게 전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연극, 마당놀이, 음악극을 넘나들며 한국 대표 극작가에 자리매김한 그는 2010년대 들어 ‘3월의 눈’ ‘먼 데서 오는 여자’ ‘1945’ 등 근현대사 질곡과 개인을 결합하는 작품들을 주로 선보였다. 국립극단이 지난해 배 작가에게 의뢰했던 70주년 신작 ‘화전가’는 그의 최근작 중에서도 가장 생동감 넘치는 무대로 꼽힐 만하다.


연극 ‘화전가’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화전가’의 배경은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경북 안동. 환갑을 맞은 김씨와 시누이, 세 딸과 두 며느리 그리고 집안일을 봐주는 할매와 그 딸 등 9명의 여인이 화전놀이를 준비하며 펼쳐지는 수다 속에 이들의 삶이 펼쳐진다.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직접 연출한 ‘화전가’는 당초 2월 개막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탓에 이제야 선보이게 됐다.

“‘화전가’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꽃이에요. 곧 폭풍우가 올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환하게 피워내는 찰나의 꽃봉오리죠. 전쟁과도 같은 코로나19 상황에서 새로운 삶의 전망을 보여주는 연극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투리가 빚어내는 리듬감은 ‘화전가’의 백미다. “지녁마동 하늘로 올러갔다 아칙에 도로 니리온다” “쥔이 지은 쥐를 치부책에다가 따박따박 씨논단다” 같은 표현은 귀로 들어와 마음 안에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낯설지만 이해가 어렵지 않은 이유다. 이 생경한 언어들은 안동 출신이었던 아내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했다. “외할머님이 살아온 얘기를 해주실 때가 있었어요. 익숙지 않은 사투리였지만 기품이 있고, 정감 있으면서, 부드러웠죠. 그 아름다움을 무대에 풀어 놓고 싶었어요.”


연극 ‘화전가’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한예종 연극원 교수로도 재직 중인 배 작가는 늘 전통적 연극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작법을 구사한다. 여성 서사를 굳이 의식하고 쓴 작품은 아니지만 ‘화전가’는 여배우만 9명 출연하는 흔치 않은 작품이 됐다. 극에서 남성(남편, 아들)은 독립운동, 사상 투쟁 등으로 여인들의 곁을 떠났거나 죽었다.

“당시 남성들은 ‘애국이냐 역적이냐’ ‘좌익이냐 우익이냐’하면서 의미를 깃발처럼 내걸고 싸우는 세계에 살았어요. 우리 삶의 진짜 토양은 어디였는지 거슬러 올라가 봤더니 그 중심에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최근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연극계를 강타한 코로나19다. 무대의상 대신 작업복을 입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후배를 보면서 “예술가의 삶을 뒷받침할 수 있는 체계적 환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배 작가는 공연 영상화와 스트리밍 등 여러 논의에서도 연극의 ‘본체’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무대예술로서의 연극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믿음에서다.

“연극은 비를 맞고 와서 표를 찾고 기다리는 과정까지를 아우르는 체험의 과정이에요. 누구는 무의미하다고 하는 그 과정이야말로 연극을 진정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들이지요. ‘언택트’의 시대에 우리가 상실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구상 중입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