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65) 벨라루스 대통령이 6선에 성공하면서 30년 독재의 기틀을 마련했다. ‘변화의 상징’으로 기대를 모았던 야권 후보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37)는 한자릿수 득표율에 그쳤다. 야권 지지자들은 불법선거라고 주장하며 대규모 시위에 돌입했다.
10일(현지시간) 벨라루스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루카셴코 대통령은 전날 선거에서 80.23%를 득표해 압승을 거뒀다. 반정부 세력을 결집해 근 10년 사이 가장 큰 규모의 집회를 이끄는 등 야권의 희망으로 떠오른 티하놉스카야는 9.9%를 얻는 데 그쳤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그간 티하놉스카야를 외세의 조종을 받는 “불쌍한 어린 여성”이라고 폄훼해왔다.
야권은 벨라루스 당국이 불법·조작 선거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승리할 수 있었다는 입장이다. 벨라루스의 고질적 경기침체에 루카셴코 대통령의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관련 실정이 겹쳐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높은 상황에서 치러진 대선이었기 때문이다.
티하놉스카야도 출구조사 결과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나는 내가 본 것을 믿는다. 대다수는 우리 편에 있었다”며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티하놉스카야 선거운동본부는 “모든 지역의 투표소에서 들어온 자료에 따르면 티하놉스카야가 70~80%의 득표율을 보였다”며 불복 운동을 시사했다.
독일 정부는 선거가 조작됐다는 벨라루스 야권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독일 외교부는 “벨라루스 대선 투표에서 최소한의 규정마저 지켜지지 않았다”며 “유럽연합(EU)이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현 벨라루스 정부와 긴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논란이 ‘러시아 대(對) EU’의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CNN방송에 따르면 티하놉스카야는 지난 8일 당국이 자신의 선거운동본부 관계자들을 체포하자 신변 안전을 우려해 긴급히 피신했다가 선거 당일인 전날 오후 늦게서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권을 겨냥한 당국의 탄압이 실제 자행된 것이다. 벨라루스 인권단체인 ‘비아스나 인권센터’는 대선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5월 이후 최소 2000명이 체포됐다고 주장했다.
선거 결과에 불복한 야권 지지자 수천명은 이날 수도 민스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북동부 도시 비텝스크, 남서부 도시 브레스트, 서부 도시 그로드노 등에서도 항의 시위가 벌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벨라루스 경찰은 시위대에 섬광탄과 최루탄을 발사하며 강경히 맞섰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 3000여명이 체포된 것으로 전해졌다.
벨라루스 수사위원회는 이날 폭력 시위 가담자들을 경찰 폭행 혐의 등으로 입건했다며 이들이 8~15년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밝혔다. 루카셴코 대통령도 “도발이 있다면 같은 답을 주겠다”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소련 붕괴 후 1994년 치러진 벨라루스의 첫 자유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26년째 권좌를 지키고 있는 인물이다. 1996년 국민투표를 통해 초대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늘렸고, 2004년에는 대통령 연임 제한 규정을 없애며 종신집권의 기틀을 마련했다.
루카셴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집권 후 정치를 안정시켜 빠른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와 소련식 권위주의적 통치로 자유를 탄압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