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집중호우로 생활터전 통째 잃었다…광주·전남·북

입력 2020-08-09 16:45 수정 2020-08-09 22:45

“90세 넘은 노인 몇분은 마실 물이 없어 새벽 한때 정신이 혼미했습니다. 식수뿐 아니라 전기 공급이 아예 끊겨 현재 급식조차 불가능합니다”

9일 오전 광주 북구 헤아림요양병원 지하 기계실·전기실 입구. 이 병원 관리이사 장모(58)씨는 누런 황토물이 가득찬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망연자실했다.

병원 측은 집중호우로 불어난 지하층 물을 퍼내고 지상 6층 연면적 1만5000여㎡ 340여개 병상에 입원 중인 고령의 노인들에게 식수·식사·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몇 시간 후 단전 중인 물탱크·펌프를 거치지 않도록 상수도관과 진료실·병실 등을 ‘직수관’으로 어렵게 연결하고 대형 콘테이너처럼 생긴 발전차를 긴급 동원해 임시 전기공급을 재개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퍼내도 퍼내도 지하실 바닥이 모습을 드러나지 않아 속수무책이었다.

장 이사는 “편의점에서 전복죽, 통조림 등 간편식을 사들여 노인들이 아침과 점심 때 허기를 덜 수 있도록 하고 혹시나 지하실 추가 침수를 막기 위한 모래주머니도 쌓았지만 다가오는 태풍으로 비가 더 올 경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수마가 할퀴고 간 화개장터와 산사태로 5명이 숨진 전남 곡성, 전북 남원시·장수군 등의 사정도 심각하다.

저지대·산자락 주택을 덮친 물폭탄·흙더미로 황급히 몸만 겨우 빠져나온 주민들은 이날 오전 생활터전으로 돌아왔지만 흙탕물로 범벅이된 가재도구·옷가지 등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영호남 화합의 상징이던 경남 하동군 화개마을은 8일 하루동안 429㎜의 기록적 폭우로 섬진강 인근 화개천이 범람해 32년만에 완전 침수됐다.

이날 오전 황토물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한 화개장터는 각종 쓰레기부터 널브러진 LP가스통, 합판, 냉장고, 식탁 등으로 곳곳에 나뒹굴어 폭격을 맞은 폐허를 방쿨케 했다.

더구나 인근 하동취수장까지 물에 잠기면서 생활용수가 제대로 급수되지 않아 복구작업은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화개장터와 주변 상가 140여곳은 입구부터 내부까지 질퍽거리는 진흙으로 가득차 나중에 팔거나 쓸만한 물건을 한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화개장터 상인들은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 지 정말 막막하다”며 “삽과 빗자루로는 어림도 없다”고 울먹였다.

군청 공무원과 경찰관, 소방대원 등이 포그레인 등을 동원해 오전 일찍부터 도로에 쌓인 토사를 치우는 등 상인들의 복구작업을 도왔지만 역부족이다. 화개장터 인근에서는 5개마을 6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지리산에서 캔 나물과 약재 등을 20여년간 팔아 생계를 이어온 박모(57)씨는 “전 재산을 잃었다”며 “하늘이 원망스러울뿐”이라고 연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코로나19로 가뜩이나 손님이 없어 애를 태우던 박씨는 생계를 어떻게 꾸려야할 지 떠오르지 않는다고 담배연기를 쉴새없이 내뿜었다.

산에서 쓸려내린 토사가 주택을 덮쳐 5명이 한꺼번에 숨진 전남 곡성군 성덕마을도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쿵하는 소리와 함께 흙더미가 쏟아지더니 순식간에 주택 5채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며 “평생을 살아온 터전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가슴이 아프다“고 하소연했다.

주민 김모(66)씨는 ”쏟아진 흙더미 속에 갇힌 1명이 제발 살아 돌아오기만 바랄뿐”이라며 “그저 허망한 마음에 하얗게 밤을 지샜다”고 충혈된 눈을 매만졌다.

같은 시각 영산강과 맞닿은 문평천 둑이 무너져 논 1000여㏊가 온통 물에 잠긴 전남 나주 다시면 죽산들.

오는 가을 수확의 꿈에 부풀었던 농민들이 자식처럼 정성껏 돌봐온 벼를 통째 삼켜버린 ‘물폭탄 호수’를 원망스럽게 허허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영산강 수위 관측 이후 가장 많은 장대비가 내린 죽산들 주변에는 대형 배수 펌프장이 4곳 있지만 이 역시 집중호우로 침수돼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농민들은 멍든 가슴을 안고 물이 빠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김화면 나주시 다시면장은 “침수기간이 2~3일을 넘게되면 이삭이 패거나 벼가 호흡을 못해 썩어버린다”며 “태풍이 상륙한다니 어떻게 해야 될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지난 8일 오후 산사태로 50대 부부가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된 전북 장수군 번안면 교동리와 마을 위쪽이 쑥대밭이 된 남원시 산동면 요동마을 주민들도 생계와 다가올 제5호 태풍 ‘장미’ 걱정에 발을 동동굴렀다.

대피 중인 인근 산동면사무소에서 복구소식에 귀를 기울이던 장수군 주민 정모(58)씨는 “커다란 바위와 뿌리째 뽑힌 나무들이 평생 살아온 마을을 새벽에 와르르 덮쳤다”며 “올봄 야산 벌목작업으로 지반이 약해졌는데 보강작업을 소홀히 한 탓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섬진강 제방붕괴와 계속된 장맛비로 남원시에서만 108개 마을 상수도 공급이 중단되고 75건의 산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장수군과 남원시 주민들은 “장마에 이어 태풍까지 이어져 폭우가 또 내린다니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고 한숨만 내쉬고 있다.

광주·전남지역에서는 7일부터 쏟아진 집중호우로 9일까지 10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됐다. 30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농경지 6836㏊가 침수됐으며 2000여채의 주택·축사·양식장이 물에 잠긴 것으로 파악됐다. 전북에서도 사망 2명, 이재민 1700여명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