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표지를 넘기면 ‘들어가는 말’에 앞서 ‘표지 설명’이 먼저 눈에 띈다. 시각 디자인인 표지 디자인에 대한 설명이 여섯 개의 문장으로 적혀 있다. 시각 장애인 등을 위해 전자책, 오디오북, 점자책으로 만들 때 표지 디자인을 느낄 수 있게 글로 따로 설명한 것이다. “비록 부족한 설명이지만, 더 많은 책에 표지 디자인 설명이 담기길 바란다”는 당부도 함께 쓰여 있다.
쉬이 볼 수 없었던 표지 설명처럼 ‘난치의 상상력’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질병과 장애에 대한 생각할 거리가 한가득 담겨 있다. 이는 희귀병을 앓으면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놓인 저자의 처지와 무관치 않다. 저자는 두 번째 수능을 앞둔 2014년 과잉 면역 반응으로 소화기 입구부터 출구까지 염증이 생기는 크론병 진단을 받았다. 언제 어떻게 아플지 몰라 일상이 수시로 어그러지지만 겉보기엔 멀쩡해 장애인, 비장애인 어디에도 확실히 속하지 못한다.
저자는 이 애매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서 줄을 타는 것만 같은 느낌을 자주 받았다.…이렇게 경계(境界)에 있다는 것은 모두의 경계(儆戒)를 받는 일이기도 했다. 장애인 공동체에서는 나를 시혜적인 봉사 정신으로 무장한 열혈 비장애인으로 오해하곤 했고, 비장애인 공동체에서는 나를 어딘가 불편하고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여기곤 했다.”
경계에 선 영향인지 저자의 시선은 날카롭고 예민하다. 장애와 질병에 대해 뭉텅뭉텅 잘라내던 세간의 인식을 잘 벼린 칼로 다시 세세하게 잘라 보여주는 듯하다. 기존에 봐왔던 논의에서도 한 걸음 더 들어가 수시로 낯선 곳을 비춘다. 책을 추천한 김초엽 작가는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사유할 때만 이 명료함의 폭력이 끝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고 평했다.
‘~병’ ‘선택 장애’처럼 질병이나 장애를 은유하는 언어습관에 관한 성찰은 저자의 이런 면을 잘 드러낸다. 저자는 단지 ‘그런 표현을 쓰면 안 된다’고 일축해선 안 되고 어떤 상황에서 잘못인지 생각하고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당연히 괜찮은 것은 없으며, 당연함에 익숙해지면 다른 누군가의 문제 제기에 쉽게 시큰둥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말한다” 같은 나름의 해법도 제시한다. “미쳤다”라고 하는 대신 “대단하다”고 하고, “분노 조절 장애” 대신 “화를 못 참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공지능(AI) 음성합성 기술로 농인의 음성을 추론하는 기업 광고에 대한 비판도 묵직하다. 해당 광고는 태어날 때부터 목소리가 없었던 주인공이 가족의 목소리를 근거로 음성을 만들어 들려주는 내용으로 돼있다. 저자는 “수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현재와 인공 와우(달팽이관)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현재는 사라지고,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목소리를 잃기 전’의 비장애인의 모습과 음성합성으로 인해 ‘온전한 목소리’를 얻게 된 비장애인의 미래만이 남는다”고 지적한다. AI 기술을 언어치료에 활용한 것을 보여주는 같은 기업의 다른 광고도 도마에 올린다. 저자는 정작 주인공이 말하는 순간부터 자막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 “청각장애인에게 필요한 편의에는 관심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비판한다.
수사를 앞둔 유력인의 ‘지병’을 두고 의심하는 사회에 대한 성찰은 저자의 상황과 맞물리며 울림을 준다. 저자는 아픈 사람에 대한 의심보다 그들이 활용하려 하는 편견에 더 초점을 맞추자고 말한다. “누군가의 몸이 의심된다고 할지라도 ‘아픈 척’만을 근거로 누군가를 비난하면, 그 화살은 수시로 자신의 고통을 입증해야 하는 아픈 사람들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문제는 질병이나 장애가 아니라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이고, 아프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무조건 봐주는 사회이다.”
이밖에 비장애인이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황만이 전제된 민방위 재난 대비 교육,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과 세월호 참사를 비교하며 코로나19 사태하에서 감염병 영화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소비되는 현실에 대한 의문도 곱씹어볼 만하다.
총 여섯 장으로 구성된 저자의 성찰을 따라가다 보면 “낫지 않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이해하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바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다섯번째 장에서 만나는 다음 문장에 함축적으로 녹아있다. “난치는 내 삶의 어쩔 수 없는 조건이다. 그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낫지 않으니 될 대로 되라지, 혹은 낫지 않으니 아프다 죽어야지, 같은 체념이어서는 안 된다. 핵심은 내 몸이 낫지 않더라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난치를 더 많은 이들의 삶의 조건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책을 덮고 나면 “스물 여섯, 첫 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밀도 높은 성찰과 막힘없는 사유를 보여주는 완성형 작가의 탄생!”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가 크게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