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수도 베이루트항에서 대규모 폭발참사가 발생한 가운데 그 원인과 배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친(親)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 등이 유력 배후로 의심되는 가운데 미국과 이스라엘의 개입 가능성도 나온다.
로이터 통신 등은 베이루트 폭발 참사의 사상자가 사망자 100여명과 실종자 등 4000여명에 이르고 있다고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외신들은 폭발 당시 흰 구름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버섯 모양으로 하늘로 치솟아 마치 원자폭탄이 터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미국 CNN방송은 “폭발은 10㎞ 떨어진 지역의 건물 유리창도 부서질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베이루트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인도, 영국 등의 대사관이 밀집해 있는 지역과도 가깝다. 한국대사관과도 7.4㎞ 거리에 있다. 베이루트항은 물론 베이루트 시내가 초토화됐고, 인접국가인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까지 연기가 퍼졌다.
폭발 원인은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으나 인화성 물질인 질산암모늄이 폭발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 질산암모늄은 화약 등 무기제조의 기본원료로 사용된다. 2004년 북한 용천역 열차폭발사고 당시에도 질산암모늄을 실은 화물열차에 불꽃이 옮겨붙으면서 폭발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통신은 한 소식통을 인용해 “당시 베이루트항 창고에서 진행 중이던 용접 작업이 대규모 폭발로 이어졌다”고 전하기도 했다.
하산 디아브 레바논 총리는 사고 직후 기자회견에서 “폭발이 발생한 베이루트항 창고에는 약 2750t의 질산암모늄이 아무런 안전조치 없이 6년간 보관돼 있었던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책임자를 찾아 최고 형벌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질산암모늄 외에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 코로나19 브리핑에서 폭발과 관련해 “미국은 레바논을 지원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공장 폭발과 같은 형태의 사고가 아니었다. 끔찍한 공격으로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폭탄이었다”고 언급하면서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로버트 베어 전직 미 중앙정보부(CIA) 중동 담당 요원은 CNN에 “폭발 영상을 분석해보면 항구 창고에 질산암모늄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질산암모늄이 대규모 폭발을 일으킨 주요 원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공격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폭발을 일으킨 곳은 군수용품과 압축가스가 있는 무기고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토니 메이 전직 미 주류·담배·폭발물 관리국(ATF) 폭발물 조사관은 “질산암모늄 폭발은 노란 연기 구름을 동반하지만 폭발 당시 화면에는 붉은 구름이 보인다”면서 “질산암모늄이 폭발과 관련 없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원인도 있을 거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란 메흐르통신은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선에 배치된 미국 해군 정찰기 4대가 베이루트항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한 직후 전례가 없는 정찰 활동을 벌인 사실이 레이더영상에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어 “미 정보기관이 베이루트항에 지난 9년간 베이루트항에 고위험 폭발물인 다량의 질산암모늄이 보관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서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주장했다.
헤즈볼라는 폭발사고의 유력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유엔 특별재판소가 오는 7일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놓을 예정인 가운데 그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헤즈볼라가 관심을 돌리기 위해 혼란을 조성했다는 해석이다. 하리리 전 총리는 폭발사고가 난 베이루트항에서 2㎞ 떨어진 지점에서 2005년 트럭 폭탄 테러로 숨졌다.
헤즈볼라는 이번 폭발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헤즈볼라 소식통은 OTV 레바논과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이 베이루트항에 보관된 헤즈볼라 무기를 공격했기 때문에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일축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번 폭발이 헤즈볼라의 무기저장소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헤즈볼라가 베이루트항을 통해 이란산 무기를 밀반입하고 있다”며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란에 사실상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헤즈볼라와 적대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이스라엘의 공습이 폭발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나왔다.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은 이날 베이루트에 2주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레바논 정부는 폭발사고의 원인과 배후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레바논 최고안보위원회는 대통령에게 전담 조사반을 구성해 향후 5일 이내 사고 원인을 발표할 것을 권고했다.
폭발사고로 사망자와 부상자뿐만 아니라 실종자도 발생했다. 하마드 하산 레바논 보건부 장관은 “응급실에 연락이 끊긴 가족을 찾는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면서 “사고 당시 현장에 전기 공급이 되지 않아 저녁에 수색작업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중동 지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구호에 나섰다. 유엔은 성명을 통해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레바논 정부와 유족에 깊은 위로를 표했다”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을 레바논을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카타르와 이라크 정부는 야전병원 지원을 약속했다. 베니 간츠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은 ”레바논 정부에 의료 및 구호품 지원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