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연기에 “홍콩 역사상 가장 큰 선거 사기”… 獨도 ‘반중’ 가세

입력 2020-08-02 17:36 수정 2020-08-02 17:43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AFP연합뉴스

홍콩 정부가 9월로 예정됐던 입법회(의회) 선거를 1년 연기하기로 함에 따라 초유의 의회 공백 사태가 빚어지게 됐다.

홍콩 정부는 선거 연기 이유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확산을 내세웠지만, 홍콩 민주 진영은 친중파의 선거 패배를 피하려는 “명백한 선거 사기”라고 반발했다.

선거가 연기되자 독일은 또 다른 ‘시민권 침해’로 규정하고 홍콩과의 범죄인 인도 조약을 중단키로 하는 등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고립도 심화하고 있다.

2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람 장관이 9월 입법회 선거를 1년 연기하겠다고 밝힌 뒤 홍콩에서는 현 입법회 의원들의 임기 문제 등 입법회 공백을 어떻게 해소할 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홍콩의 헌법인 홍콩기본법은 입법회 의원의 임기를 4년으로 규정하고 있어 오는 9월 현 의원들의 임기가 끝나면 홍콩 주권 반환 후 처음으로 의회가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람 장관은 지난 31일 ‘비상대권’을 동원해 입법회 선거 연기를 발표한 뒤 중국 중앙정부에 서한을 보내 이 문제에 대한 ‘유권 해석’을 요청했다.

홍콩에서는 중국이 1년짜리 의원을 지정하거나 현 의원들의 임기 연장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홍콩 내각인 행정회의 구성원인 입궉힘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1년간 입법을 맡을 ‘임시 의원’을 지정하면 된다고 제안했다.

그는 홍콩 입법회의 현역 의원 중심으로 임시 의원을 구성하되 일부 외부 인사를 임명하거나 선거 후보 자격이 제한된 부적격자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현재 야당 의원들 상당수를 축출하고 친중파 인사들 중심으로 의회를 구성하자는 취지여서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으로 민주 진영에 족쇄를 채운 데 이어 1년간 입법권까지 장악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22명의 야권 의원들은 지난 1일 공동 성명을 내고 “람 장관의 선거 연기 결정으로 의회가 블랙홀에 빠져들었다”며 “(홍콩 정부는)이를 기회로 가혹한 법과 정책을 통과시킬 것”이라고 반발했다.

홍콩대 법대 에릭 청 교수는 중국 본토의 홍콩 입법회 임시 의원 임명은 반대 세력 없는 의회를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앞서 조슈아 웡은 트위터를 통해 “(선거 연기는) 명백히 홍콩 역사상 가장 큰 선거 사기”라면서 “중국은 범민주 진영의 입법회 과반을 막기 위해 여러 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인대 대표인 마펑궉은 현재 임시 입법회 구성을 위한 의원을 임명할지, 아니면 현역 의원들의 임기를 연장할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전인대 상무위원회에 있다고 주장했다.

행정회 구성원인 로니 퉁은 “중국 본토의 개입은 최소한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홍콩 스스로 임시 의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전인대가 임시 의원을 임명할 경우 홍콩의 자율은 더욱 유명무실하다는 비난이 쏟아질 수 있어 본토의 개입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호사협회 부회장인 애니타 입은 입법회 조례에 홍콩 행정장관이 선서를 14일간씩 연기할 수 있기 때문에 ‘선거 1년 연장’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만약 2주씩 연기하다 11월이나 12월쯤 선거를 치를 수 있다면 2~3개월 연기되는 셈이어서 의회 공백 사태가 심각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입법회에서 민주 진영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은 강화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홍콩 선거관리위원회는 최근 현역 입법회 의원 4명을 포함한 12명의 입법회 선거 출마 자격을 제한하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홍콩 입법회는 지역구 35석과 직능대표 35석 등 총 70석으로 구성되지만, 직능대표는 친중파가 대부분 장악하고 있다.

한편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지난 31일 홍콩이 입법회 선거를 연기하기로 결정하자 “홍콩 시민의 권리에 대한 또 다른 침해”라고 지적하며 홍콩과의 범죄인인도 조약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마스 장관은 “우리는 중국이 국제법상 법적 책임을 준수할 것이라는 기대를 수차례 밝혀왔다”면서 “여기에는 홍콩 기본법에 따라 보장된 권리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권 보장 등이 포함된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는 상·하원 의원 30명이 지난 29일 첫 회의를 갖고 홍콩 보안법 등 인권 침해에 관여한 개인과 단체에 제재를 가하는 법안 제정을 논의했다.

이들이 준비하는 법안은 인권 침해 의혹 사건에 대해 의회가 행정부에 조사를 요구하고, 인권침해가 확인되면 일본에 있는 개인이나 단체의 자산 동결, 입국 거부, 강제 추방 등의 제재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일본은 홍콩보안법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왔으나 최근 집권 자민당 내에서도 시진핑 국가주석의 방문을 공식 철회하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SCMP는 전했다.

법안 제정을 주도하는 야마오 시로이 의원은 “일본처럼 자유와 민주, 법치가 있었던 홍콩에서 지난해 벌어진 경찰의 충격적인 시위대 해산 장면을 보고 제재 법안 논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일본에 있는 홍콩인들을 보호하고,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오는 홍콩인을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홍콩 보안법에 따라 조사하는 사안에 대해 협력을 거부토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