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분열이나 국가정권 전복 등의 행위에 대해 최고 종신형에 처하도록 한 홍콩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지 한 달이 지났다.
무시무시한 중국식 공안통치가 시작되자 민주파 단체들은 줄줄이 해산을 선언했고, 홍콩 도심 시위는 거의 사라졌다. 진보 학자의 해고 소식도 전해지고, 이민·유학 등 ‘탈 홍콩’ 행렬도 줄을 잇고 있다.
미국이 홍콩에 부여했던 특별지위를 폐지한데 이어 영미권 5개국 기밀정보 동맹체인 파이브아이즈(Five eyes)가 모두 홍콩과의 사법적 관계를 단절했다. 과거의 자유로운 홍콩은 사실상 사망했다는 지적이 나오고,현재의 홍콩은 서방과 중국의 체제 격전장으로 변했다.
29일 홍콩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2014년 홍콩의 ‘우산 혁명’을 주도했던 베니 타이(56) 홍콩대 법대 교수가 해임을 당했다. 홍콩대 이사회는 전날 회의에서 베니 타이 교수의 해임안을 찬성 18표, 반대 2표로 통과시켰다.
2014년 홍콩 도심에서 진행된 우산 혁명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 운동을 활발하게 펼쳐온 타이 교수는 지난해 4월 공공소란 혐의 등으로 징역 16개월을 선고받았다.
홍콩대 이사회는 법원 1심 판결을 이유로 그를 해임시켰다. 타이 교수는 오는 9월 입법회 선거를 앞두고 야권 예비선거 등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인물이어서 ‘괘씸죄’에 걸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타이 교수의 해임에 대해 홍콩 주재 연락판공실(중련판)은 “악에 대한 처벌이자 정의의 실현”이라고 논평했다. 중련판은 “베니 타이는 센트럴 점령 시위와 야권 예비선거를 조직, 기획, 선동하는 등 사회의 갈등을 부추겼다”고 맹비난했다.
타이 교수는 “나의 해임 결정은 홍콩대가 아니라 대학 배후의 기관이 내린 것”이라며 “홍콩 내에서 학문 자유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반발했다. 타이 교수와 함께 재판을 받은 슈카춘(50) 홍콩침례대 강사도 다음달 계약 종료를 통보받았다.
타이 교수의 사례는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달라진 홍콩의 사상통제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 1일 홍콩 보안법 본격 시행 후 홍콩에서는 반중 시위가 사라졌다. 홍콩 주권반환 기념일을 맞아 그날 벌어진 도심 시위에서 370명이 체포되고 10명이 홍콩보안법 적용을 받았다는 보도가 사실상 마지막 반중 시위 기록일지 모른다.
지난해 6월 이후 주말마다 홍콩 시민이 거리에서 ‘광복홍콩 시대혁명’ 등의 구호를 외치던 모습은 종신형 처벌이 가능한 홍콩보안법의 위력에 자취를 감췄다.
홍콩보안법이 본격 시행된 지난 1일에만 ‘데모시스토당’과 ‘홍콩민족전선’ ‘홍콩독립연맹’ 등 민주파 단체 7곳이 해산을 선언했다. 그만큼 민주 진영이 느끼는 공포감이 크다.
홍콩독립연맹 창립자 웨인 찬은 해외로 도피했고, ‘우산 혁명’을 이끈 네이선 로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홍콩 자치’를 주장해 온 학자 친완은 사회운동 중단을 선언했다.
탈 홍콩 바람도 거세다. 지난달 해외 이민에 필요한 ‘양민증’ 발급 건수가 전월보다 63% 급증했고, 해외 이민 컨설팅 업체들에는 영국, 캐나다, 호주, 미국 등으로 이민을 문의하는 사람이 급증했다.
올해 대만 대학을 가려는 홍콩 학생들이 70% 가량 늘었고, 영국과 호주 등으로 유학 떠나려는 홍콩 학생들도 지난해보다 50% 가까이 늘었다.
홍콩 보안법 시행으로 궁지에 몰린 민주파는 오는 9월 입법회 선거에서 권토중래를 노리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핑계로 선거를 연기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민주파 진영은 지난해 11월 구의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데 이어 오는 9월 입법회 선거에서도 70석 중 과반수를 차지하자는 ‘35플러스’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홍콩 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파 후보들에게 사상검증 성격의 ‘충성 질의서’를 보내는 등 후보 자격을 무더기로 박탈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우산혁명’의 주역인 조슈아 웡은 지난해 구의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선관위는 그의 후보 자격을 박탈했다.
특히 홍콩 행정회의는 전날 캐리 람 행정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어 코로나19가 계속 확산할 경우 9월 입법회 선거 연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친중파 진영은 입법회 선거 연기를 강하게 주장해왔고, 일각에선 중국 중앙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펴는 등 패색이 짙은 선거 연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홍콩 보안법 시행으로 서방의 전방위 대중 공세가 시작되면서 중국은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4일(현지 시간) 홍콩에 대한 특별지위를 박탈하는 행정명령과 중국의 홍콩보안법 제정 및 시행에 관여한 중국 관리들에게 금융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홍콩자치법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홍콩은 이제 중국 본토와 똑같이 취급될 것”이라며 “(홍콩에 대한) 특권, 특별한 경제적 대우, 민감한 기술의 수출은 이제 없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뉴질랜드를 비롯해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서방 영미권 5개국 기밀정보 동맹체인 파이브아이즈(Five eyes)는 모두 홍콩과의 사법적 관계를 단절했다.
윈스턴 피터스 뉴질랜드 외교장관은 28일 성명을 내고 “더는 홍콩의 사법체계가 중국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이라고 신뢰할 수 없다”며 홍콩과의 범죄인 인도조약 중단을 발표했다.
최근 미국 영국에 이어 프랑스가 자국 5G 네트워크 구축에서 중국의 화웨이를 배제키로 한 것도 홍콩보안법을 둘러싼 서방과 중국의 갈등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