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똑바로 입으라”는 경찰에…필리핀서 미투운동 시작

입력 2020-07-29 14:47
필리핀 현지 여성들이 트위터에서 "성범죄 피해자를 탓하고, 재범 가능성을 외면하는 악습을 이제 끝내자"는 푯말과 함께 #히자아쿠(나는 여성이다) 해시태그를 공유하고 있다. 사진 속 여성은 16년 전 유명 모 연예인으로부터 마약을 흡입당한 뒤 성폭행 당했다고 주장하는 전직 연예인 캣 알라노. 출처: 트위터, 캣 알라노 인스타그램

필리핀 여성들이 “성범죄를 당하기 싫다면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 말라”는 경찰 당국에 맞서 ‘필리핀판 미투운동’을 벌이고 있다.

일반인을 비롯해 현지 정치인 가족과 방송인 등 유명인사들도 동참해 #히자아코(HijaAko)라는 해시태그를 달며 고질적인 여성 성폭력 범죄 및 2차가해에 저항하고 있다고 홍콩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29일 보도했다. 히자아코란 필리핀어로 “나는 여성이다”는 의미다.

이번 미투 운동은 지난달 12일 필리핀 독립기념일 직전 마닐라 남부 퀘존주의 한 지방 경찰서에서 올린 페이스북 게시글에서 시작됐다. 경찰 측은 “여성 여러분, 옷을 야하게 입지 말라. 그러다 성폭력을 당하고서야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것 아닌가. 생각 잘 해봐라”라고 글을 올렸다.

경찰 측은 해당 게시글을 바로 삭제했으나 여성들은 분노했다. 필리핀 여성들은 #히자아코 해시태그를 SNS에 퍼뜨리면서 성범죄 피해여성에 대한 경찰의 2차 가해를 계속 지적했다. 관련 트위터 게시물은 5만건에 이른다.

필리핀 현지 여성들이 공유하는 그림 문구. "누군가가 (피해자인) 내 바지가 너무 짧았으니 내 탓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집에 가서 바지를 더 짧게 만들었다. 그들을 비웃으려고"라고 적혀있다. 출처: 트위터

필리핀 여배우 샤론 쿠네타 팡기린안과 상원의원 프랜시스 판기린의 딸 프랭키 판기린(19)은 트위터로 “여성들에게 옷 입는 법을 가르친다?? (오히려) 범죄자들에게 강간하지 말라고 가르쳐라”라고 응수했다.

전직 연예인인 캣 알라노(35)는 강간과 성폭행이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트위터에 “#rhymeswithwrong이라는 별명을 가진 모 유명 연예인에게 (19살에) 강간당했다. 당시 나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알라노는 본인 외에도 피해자가 다수 있다고 덧붙였다.

과거 유명 모 연예인으로부터 마약을 흡입당한 뒤 성폭행 당했다고 주장하는 전직 연예인 캣 알라노. 출처: 캣 알라노 인스타그램

히자아코 운동은 그동안 침묵했던 강간 및 성폭력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계기를 제공하는 등 필리핀 여성 인권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필리핀 국가교회협의회의 여성인권운동가 아르셀리 빌레는 “여성이 목소리를 높이지만 언제나 그 위에는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운다”면서 “일부 피해자들은 결국 자책까지 하게 된다”고 말했다.

2017년 필리핀 인구보건조사 결과 기혼 필리핀 여성 10명 중 1명은 성관계 거부, 자녀 돌봄 소홀, 요리 실수 등으로 남편이 부인을 때려도 된다고 응답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강간 및 성범죄를 주제로 수차례 망언을 내놓았다.

성범죄를 두둔하는 듯한 망언으로 비판받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출처: SCMP

그는 2018년 시장으로 부임했던 도시 다바오를 언급하며 “다바오엔 강간 사건이 많다더라. 미녀가 많은 한 강간사건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듬해에는 도시 바기오에서 열린 군 졸업식에서 생도들의 과거 범죄를 사면해주겠다면서 “(사면 대상으로) 1순위는 강간죄 단독범, 2순위는 강간에 마약에 절도범, 3순위는 미인 많기로 소문난 바기오에서의 복수 강간”이라고 농담투로 말했다.

"여성을 존중하라" 출처: SCMP

필리핀 인권 위원회의 트윌라 루빈 변호사는 잘못된 인식을 방치하면 강간 문화가 영구적으로 고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루빈 변호사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망언들을 인용하면서 “국가는 여성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데 지도자 자체가 성폭력을 자행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비판했다.

또한 루빈은 “공직자들이 강간을 농담처럼 생각하면 대중들도 이에 영향을 받아 문제의식을 잃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성훈 기자 tell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