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북한, 집요하게 현금 요구…박지원은 “단호히 거절했다”

입력 2020-07-28 16:09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는 6·15 남북정상회담 조율을 위해 2000년 3~4월 총 4차례 송호경 조선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막후 접촉을 했다. 당시 북측은 협상 초기부터 현금 지원을 끈질기게 요구해왔던 것으로 나타났다. 박 후보자가 북측 요구에 난색을 표하면서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 그해 4월 8일 전격적으로 정상회담 합의가 이뤄지게 된다.

박 후보자는 2008년 6월 서울대 6·15연석회의 초청 강연에서 6·15 정상회담의 막후를 상세히 설명했다. 당시 강연록을 보면 박 후보자는 2000년 3월 9일 싱가포르에서 송 부위원장과 상견례 성격의 비공식 접촉을 했다. 이후 3월 17일과 22일, 4월 8일 등 총 세 차례에 걸쳐 남북정상회담 조율을 위한 특사회담을 가졌다. 회담 장소는 1차는 상하이, 2차와 3차는 모두 베이징이었다.

박 후보자에 따르면 북측은 1차 회담부터 현금을 요구했다. 박 후보자는 당시 강연에서 현금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며 “정상회담 후 교류협력을 통해 상업차관과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가능하지만 우리 예산절차상 (현금 지원은) 불가능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박 후보자가 27일 비공개 청문회에서 “현금 지원은 안 되지만 민간기업 투자로 20억~30억 달러 투자가 가능할 것”이라고 해명한 것과 맥이 닿는다.


1차 회담은 박 후보자가 현금 지원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사실상 결렬됐다. 닷새 뒤 북측 요구로 2차 회담이 열렸으나 역시 현금 지원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그로부터 다시 17일이 지난 4월 8일 3차 회담에서 양측은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게 된다. 박 후보자는 “합의 후에 안 사실”이라며 2차와 3차 회담 사이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과 국정원이 베이징에서 북측과 따로 접촉했다고 밝혔지만 세부 사항은 설명하지 않았다.

북측의 현금 요구 사실은 당시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임 전 장관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서 “북측은 일정액의 현금 지원까지 요구했다”며 “그러나 박 특사(박 후보자)는 ‘정상회담 후에 인도적 지원이나 경제협력은 가능하나 현금 지원은 불가하다’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전했다. 임 전 장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 전 경제원조에 대한 구체적 약속은 불가하다는 생각이 확고했다”고도 밝혔다.

그러나 협상이 평행선을 달리자 우리 측은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한 발짝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임 전 장관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3차 회담을 위해 베이징으로 떠나는 박 후보자에게 “잘사는 형이 가난한 동생네 집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며 “정상회담 선물로 우리가 현금 1억 달러를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마지막 협상에 임하라”고 지시했다. 4·8 합의 당시 현금 지원 관련 합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1억 달러 지원 문제는 노무현정부 시절이던 2003년 대북송금 특검에서 규명됐던 부분이다.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의 이른바 ‘이면 합의서’에 나타난 투자 및 경제협력차관 25억 달러와 인도적 지원 5억 달러와는 차이가 크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