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섭의 대기실] 성장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선수

입력 2020-07-26 04:42 수정 2020-07-26 18:20
그리핀이 한창 ‘챌린저스의 킹존’으로 이름을 날리던 2018년 3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아프리카TV 프릭업 스튜디오의 기자실 겸 선수대기실에서 그를 처음 봤다. “지훈아, 어제 연습 잘했어?” “아, 당연하지. 내가 카르마로 두 판 다 캐리해서 이겼다니까.” 키가 크고 마른 소년은 어젯밤 자신이 LCK 팀과의 스크림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며 팀원 앞에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소년은 그날 게임 2세트에 교체 투입됐다가 바로 강판당했다. 그리핀은 해당 시즌에 단 두 번의 세트패를 기록했는데, 마침 후보 선수였던 그가 출전한 경기에서 시즌 두 번째 패배를 당했다. 풀이 죽은 채 기자실로 돌아와 앉아있던 그의 뒷모습이 불과 1시간 전과 몹시 상반돼 인상 깊었다. 하필 전날 스크림에서 캐리했다던 카르마로 졌다. 그때는 몰랐다. 그때 옆 자리에서 의기소침해하던 소년이 국내 제일의 미드라이너로 성장할 줄은.
쿠키뉴스 DB

DRX ‘쵸비’ 정지훈의 성장세는 놀랍다. 2018년 서머 시즌엔 ‘슈퍼 루키’로 이목을 끌더니, 이듬해에는 세계무대에서도 통하는 선수로 발돋움했다. 올해는 전 포지션을 통틀어 LCK 최고의 선수로 꼽힐 만한 활약을 이어나가고 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2001년생 미드라이너의 기량은 여전히 가파른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그리핀 시절을 포함해 정지훈을 수차례 인터뷰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첫째, 그는 다른 선수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는 걸 거북해하지 않는다. 둘째, 누구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를 숨기지도 않는다. 롤드컵에선 ‘도인비’ 김태상(펀플러스)의 스타일이 제일 인상 깊었고, 그런데 막상 따라 해보니 잘 되지 않았고, ‘페이커’ 이상혁(T1)이 조이로 라인전을 풀어나가는 법을 참고했고…. 심지어 “맨 처음엔 (김대호) 감독님이 다른 거 못 하게 하고 ‘도파’가 라인전 하는 거 리플레이만 보게 했어요.” 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셋째, 이런 개방적 사고야말로 그의 성장 원동력이자 최고 장점이다.

작년처럼 ‘라인전을 빼어나게 잘하는 선수’ ‘CS를 잘 먹는 선수’란 수식어로는 이제 정지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요즘 그는 다른 라인에 영향을 끼치는 플레이의 빈도가 눈에 띄게 늘었다. 그는 25일 젠지전 3세트에서 경기 시작 후 3분 만에 탑으로 순간이동해 퍼스트 블러드를 따냈다. 지난 19일 팀 다이나믹스전 2세트에 이어 또 한 번 빠른 탑 다이브를 성공시킨 셈이다.
2020 LCK 서머 정규 시즌 2R DRX 대 젠지전 중계화면

젠지전 3세트 당시 DRX의 탑 다이브는 ‘때마침’ 라인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나 상대방보다 먼저 귀환한 정지훈(트위스티드 페이트)이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만들어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DRX가 미리 설계해온 플레이였으며, 동시에 정지훈이 ‘비디디’ 곽보성(아지르)에게 맞아가며 가까스로 라인을 밀어넣은 끝에 만들어낸 임기응변식 플레이였다.

‘표식’ 홍창현(리 신)은 젠지전 3세트의 초반 동선을 레드→미드→블루→탑 순으로 설계해왔다고 했다. 미드에 2레벨 갱킹을 가 곽보성의 체력을 깎아놓고, 다시 정글을 돌아 3레벨을 찍은 뒤 탑 다이브를 시도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경기 직후 기자실 인터뷰에서 “3레벨을 찍을 즈음이 탑에 빅 웨이브가 쌓일 타이밍이었고, 이때 다이브를 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노련한 곽보성이 홍창현의 2레벨 갱킹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으면서 DRX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3세트 때 라인전이 망했어요. 2레벨 갱킹에 실패하면서 상대 선수와의 경험치 차이가 벌어졌거든요.” 젠지전을 마친 뒤 국민일보와 만난 정지훈은 당시 상황을 복기하며 이처럼 말했다.
2020 LCK 서머 정규 시즌 2R DRX 대 젠지전 중계화면

“탑 다이브를 보려면 제 순간이동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탑라인에 미니언 웨이브가 박힐 때쯤 되니 미드라인 미니언 웨이브를 억지로 클리어하고, 본진으로 귀환했다가 순간이동해야겠다 싶었죠. 그렇게 하면 상대가 귀환 타이밍을 잡지 못하거나, 잡더라도 다이브에 대응하기엔 늦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리스크 있는 플레이였죠.”

킬을 헌납하기 직전까지 얻어맞은 그는 가까스로 먼저 라인을 밀어넣는 데 성공했다.

“솔직히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곽보성 선수가 저를 잡으러 들어오면 점멸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라인을 정리하러 앞으로 들어갔는데… 제가 먼저 점멸을 썼지만 결과적으로 점멸이 교환됐어요.

이 탑 다이브로 DRX는 경기 초반 ‘도란’ 최현준(케넨)의 성장에 탄력을 붙일 수 있었다.

불현듯 정지훈이 지난 5월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정지훈은 T1과의 스프링 시즌 플레이오프 2라운드 경기 패인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했다. 그는 다른 라인에 영향력을 선사하는 플레이를 연구하겠다고 다짐했다.

“저는 영향력을 키워야 해요. 영향력이란 게 뭐냐면… 빠르게 라인을 밀어 넣고, 남은 시간에 상대 정글러를 찾거나 와드를 설치하는 거죠. 저는 아무래도 미드라이너다 보니까 다른 라인이나 게임에 영향을 줘야 해요. 제가 그걸 해내지 못한 게 게임 패배에도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요. 개선해야죠.”

불과 2개월 새에 그는 이 분야에서 괄목할 성장을 이뤘다. 그러니 앞으로가 더 궁금할 수밖에. 내년, 또 내후년의 정지훈은 어떤 수식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 중계진이 한 목소리로 외칠 ‘쵸’와 ‘비’ 사이에는 얼마나 더 많은 ‘오’가 들어갈까. 그는 성장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선수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