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머슬매니아 세계챔피언. 2014~2016년 NABBA 코리아 3년 연속 전 체급 우승. 2018년 PCA 프로전 1위. 183㎝에 110㎏의 거대한 몸으로 매년 국내외 보디빌딩 대회를 휩쓸던 ‘대한민국 헤비급의 자존심’ 윤종묵 선수는 지난해 돌연 자취를 감췄다.
그런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무대가 아닌 신장병 환우 모임 커뮤니티였다. 익숙한 시합 트렁크 대신 흰색 환자복을 어색하게 걸친 윤 선수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온몸을 갑옷처럼 뒤덮었던 근육은 50kg 가까이 빠졌고 얼굴은 부종으로 퉁퉁 부어 있었다.
윤 선수는 만성 신부전증을 진단받고 올해 3월 친아버지로부터 신장을 이식받았다. 20년 가까운 보디빌더 생활이 그의 몸을 망가트린 것이다. 폐에 물이 차 사경을 헤맨 적도 여러 번이었고 코피가 8시간 동안 멈추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밀려드는 후회에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돌이켜보니 남을 도와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수술 후 4개월이 지난 7월, 윤 선수는 신장병 환우들을 위한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음식을 조심해야 하는 신장병 환자들에게 영양 정보를 제공하고 재활 운동을 알려주겠다는 취지에서다.
국민일보는 22일 인천 송도 팀윤짐을 찾아 윤종묵 선수를 만났다. 어딘가 부드러워진 눈빛의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에게 매년 기부할 계획”이라며 “앞으로의 삶은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1.5평 고시원의 꿈, 세계 챔피언을 만들다
날 때부터 우량아였던 그는 초등학교 때 유도를 시작해 대학교 입학 때까지 엘리트 선수로 컸다. 그러나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던 훈련 환경은 그가 유도 깃을 놓게끔 했다. 그는 “진학을 위해 운동을 하다 보니 압박감이 커서 유도가 재밌다고 느낀 적이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운동이 재미로 다가온 것은 유도를 그만두면서부터였다. 140㎏ 가까이 넘는 헤비급 선수였던 그는 현역으로 입대하기 위해 128㎏까지 감량했고, 군 제대까지 50㎏을 더 뺐다. 선수 시절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꾸준히 해온 터라 몸은 자연스레 만들어져 있었다. 윤 선수는 “복근이라는 것을 처음 본 날을 잊지 못한다”면서 “이 기분을 많은 사람이 느꼈으면 해서 트레이너를 꿈꾸게 됐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트레이너가 되기 위해선 먼저 성공한 보디빌더가 되어야 했다. 잡지에 나온 보디빌더 홍준영 선수의 사진을 찢어 들고는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처음 마주한 홍준영 선수는 “나는 모르는 사람과 운동 안 한다”며 어린 윤종묵을 돌려보냈지만,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다시 찾아오는 그를 결국 제자로 받아들였다. 윤 선수는 체육관 옆의 1.5평짜리 고시원에 누웠던 그 날 밤을 ‘인생 최대로 설렜던 날’이라고 회상했다.
2006년 처음 출전한 미스터 인천에서 –85㎏급 2위를 한 이후 보디빌더 윤종묵은 대한민국 헤비급의 상징이 됐다. 2007년에는 미스터 서울과 미스터 YMCA에서 +90㎏급 1위를 했고, 2013년에는 머슬마니아 세계대회에서 전 체급 챔피언이 되었다. 2014년 NABBA로 소속을 옮긴 이후에도 3년 연속 세계챔피언 트로피를 들었다. 부와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자신의 이름을 딴 체육관은 30개의 체인점을 가진 대형 브랜드가 되었다. 보충제 사업 등 다른 사업도 순항을 달렸다. 마치 인생이 정해진 해피엔딩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듯했다.
헤비급 보디빌더를 주저앉힌 만성 신부전증
“솔직히 저는 느끼고 있었어요. 몸에 안 좋은 걸 해왔으니까요.”
병은 갑자기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증상이 갑자기 나타났다. 무리한 사업 확장과 세계 대회에서 입상하기 위해 사용한 약물은 십여 년에 걸쳐 몸을 서서히 갉아 먹고 있었지만, 증상이 나타난 것은 한순간이었다. 소변으로 독소가 빠지지 않아 입에선 악취가 났고 얼굴은 퉁퉁 부었다.
윤 선수는 병원 대신 가족과의 여행을 선택했다. 다시는 가족과 여행을 못 갈 수도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어렴풋이 저도 알고 있던 것 같아요. 프로 보디빌딩 대회에서 1등을 하기 위해 안 좋은 것들에 손을 대 왔으니까요. 제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만 수십 명이라 대회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어요. 그런 상황에서 운동을 하다 보니 저를 망가트려 버린 거죠. 가족과 인생, 건강을 잃어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여행을 다녀온 뒤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자리에 누우면 폐에 고인 물이 기도를 눌러대는 바람에 소파에 앉아 3일 밤을 새웠다. 윤 선수는 “그때 병원을 갔어야 했는데, 내가 병에 걸렸다는 현실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 병원을 못 갔다”면서 “걱정하는 아내를 달래면서도 뒤에선 32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고 당시의 좌절감을 설명했다.
병은 그를 성실하게 잠식해 나갔다. 아침에 터진 코피가 8시간 동안 멈추지 않던 날, 윤 선수는 응급실에 실려 갔다. 검사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신장의 건강 상태를 나타내는 크레아틴 수치가 정상범위인 0.8을 넘어 26까지 치솟아 있었고 혈압 역시 230을 넘나들었다. 의사는 혈압을 견디지 못한 혈관이 뇌에서 터졌고, 이것이 코피로 흘러나왔다고 설명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말과 함께 그의 투병 생활은 시작됐다.
옆에 누워있던 다른 신장병 환자의 병상이 정리되던 날, 윤 선수는 현실감 없던 죽음이 피부로 성큼 다가왔다고 말했다. 죽음을 마주하니 가족이 보였다. 곧 만질 수조차 없을 거란 생각에 어린아이처럼 아내에게 손을 잡아달라 하기도 했다. 담배 때문에 아빠가 아픈 줄로만 아는 다섯 살배기 딸도 눈에 밟혔다. “딸에게 다정한 아빠가 못 되어준 게 너무 후회스러웠어요. 제 아내에게도…. 그때 다짐했어요. 다시 살아난다면 내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위해 살아보자.”
20년 만에 만난 아버지가 내놓은 신장
“종묵아. 신장, 아빠가 줄게”
20년 만에 마주한 아버지는 병실 앞을 서성대다 대뜸 신장을 주겠노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 헤어져 한참을 따로 살았던 터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윤 선수는 “너무 감사했죠. 근데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오히려 아버지가 당연한 일이라고 먼저 말씀해 주셨어요”라고 말했다.
3월 9일, 윤종묵 선수는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아버지의 신장은 죽어가던 윤 선수의 몸을 기적처럼 살리기 시작했다. 위험 신호를 보내던 크레아틴 수치와 혈압이 정상에 가깝게 돌아왔다. 폐에 고인 물이 빠져 숨쉬기가 편해졌고 두통도 많이 사라졌다. 빠른 회복 덕에 윤 선수는 4개월 만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퇴원 후 처음 마주한 거울엔 근육질의 보디빌더 대신 50㎏ 가까이 빠진 낯선 남성이 서 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편하게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딸아이를 안아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는 오른쪽 팔에 새겨진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딸이 점점 커가는 걸 못 보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해요. 인생 2막에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가족들을 잘 챙기려고요.”
덤으로 얻은 삶, 도우며 살고 싶어요
윤종묵 선수는 병상에서 했던 다짐을 잊지 않았다. “제가 오래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남을 돕지 못한 게 너무 후회됐어요. 그래서 올해부터 매년 신장병 환자들 수술비를 장기적으로 병원에 후원할 생각이에요. 유튜브를 하는 이유도 비슷해요. 신장병 환자들이 병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는데 제가 아는 것들을 공유하고, 환자들을 위한 운동법 같은 것도 동영상으로 찍어 올릴 예정이에요.”
무대 위, 뜨거운 응원 소리와 함께 트로피를 들어 올리던 보디빌더 윤종목은 이제 없다. 평생 만들어온 근육도 모두 잃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지금에서야 더 큰 것을 얻었다고 한다.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이전에는 늘어지게 자면서 하루를 막 보낸 적도 있고, 아이가 놀아달라고 하는데 귀찮아서 미룬 적도 있어요. 그런 게 전부 다 후회되더라고요. 하루를 살더라도 그런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어야 했는데. 이제야 그걸 알게 됐네요.”
이어 그는 “비슷한 길을 걷는 후배 보디빌더들이 저와 비슷한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각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겠지만 몸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해요. 저처럼 무섭다고 병원 가는 걸 피하지 말고요”라며 웃어 보였다.
응원의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인생에서 좌절의 순간을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무서웠어요. 병원에서 못 걸어 나갈 것만 같았거든요.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나와서 아내랑 등산도 가고 자전거도 탑니다. 얼마나 재밌는데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못 이겨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홍근 객원기자, 영상=최민석 기자 yulli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