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주관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진상조사단’이 피해자 측 불참으로 출범도 못 한 채 무산됐다. 강제수사권이 없는 조사단을 꾸리겠다고 제안했다가 “자격도, 실효성도 없다”는 비판만 듣고 물러섰다. 무리하게 ‘피해자 측 요청’이라는 명분을 지키려다 시간만 낭비한 결과가 됐다.
서울시는 22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 피해자 지원단체가 서울시 진상규명 조사단 불참 의사를 밝힘에 따라 합동조사단 구성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며 “피해자 측 요구를 수용해 조사단 구성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어 “조속한 진상규명을 위해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가 이뤄지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했다.
이날 오전 피해자 측은 “서울시는 이 사안에서 책임의 주체이지 조사의 주체일 수 없다”며 “국가인권위원회 조사를 통해 피해자가 제기한 문제가 제대로 밝혀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진상조사단 논란의 시발점은 지난 1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해자 측에서 “서울시가 조사단을 구성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밝히면서다. 이틀 뒤 서울시는 “서울시와 피해자 지원 여성단체 등으로 이뤄진 ‘민관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철저한 진상규명을 약속한다”고 했다.
하지만 곧바로 ‘서울시 안’에 대한 회의론이 쏟아졌다. “강제수사권 없는 생색내기용” “조사 대상자인 비서실 공무원들이 대부분 퇴직해 조사대상자들이 없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급기야 피해자 측도 16일 “서울시가 내놓은 대책을 통해서는 본 사건을 제대로 규명할 수도, 할 의지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사실상 ‘서울시 안’에 퇴짜를 놨다. 이들은 “경찰이 서울시청 6층에 있는 증거를 보전하고 수사자료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 날 서울시가 한발 물러섰다. 민관합동조사단 대신 전원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을 꾸리겠다고 했다.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를 포함해 한국여성단체연합, 국가인권위원회, 한국여성변호사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한국젠더법학회 등 7곳에 참여 요청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어느 단체도 참여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여성변호사회는 되레 19일 성명서를 내고 “조사 대상인 서울시가 조사단을 꾸린다는 것은 공정성과 진실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서울시 직원 및 정무라인이 경찰수사에도 협조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강제력이 없는 조사단의 조사에 응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공문 회신 시한인 이날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오전 11시 피해자 측이 “서울시가 아닌 인권위에 맡기겠다”는 뜻을 확실히 밝히면서 계획을 접었다.
서울시 입장에서 진상조사단 구성은 나쁠 게 없었다. 90일로 제한된 조사 기간 안에 사태를 조기 수습할 수 있는 게 큰 장점이었다. 또 사건 책임자인 서울시가 ‘팔짱만 끼고 있다’는 비판도 떨쳐낼 수 있었다. 성추행 묵인 의혹에 대한 사실관계도 일찍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피해자 측 요청’이라는 명분이 있으면 ‘셀프 조사·면죄부’ 논란도 어느 정도 비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 측의 수락 여부를 오판했다.
서울시는 “피해자가 인권위 진정을 통해 조사를 의뢰할 경우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또 “현재 진행 중인 방조‧묵인, 피소사실 유출 등과 관련한 경찰, 검찰 수사에도 성실하게 임하겠다”고 했다.
시 자체 진상조사 계획에 대해선 “인권위 조사와 겹칠 수 있는 데다 직원들 간 불협화음, 제 식구 감싸기 오해 등의 우려가 있어 시행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피해자 측이 폭로한 직원들의 2차 가해 문제 제기에 대해선 “그런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며 “인권위 조사 결과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오주환 기자 joh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