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표 영원한 죽음을 살다

입력 2020-07-19 21:03 수정 2020-07-19 21:18
고 이중표 목사.

지난 7월 7일은 고 이중표 목사님 추도일이었다. 2005년 그날 새벽, 그는 그동안 그를 붙잡았던 질고의 사슬을 끊고 그가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 품에 안겼다. 당시 서울의 모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나는 그의 부음을 듣고 분당으로 달려갔다. 그의 환히 웃는 영정앞에서 그를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애도하고 있었다. 향년 67세, 아직 더 살아도 되는 아까운 나이였다.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며 모든 날의 문제는 죽는 것'이라는 빅톨 유고의 말대로 죽음의 문제는 우리 생의 최고, 최후의 문제가 아닌가? 툭하면 비극적 죽음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세태속에서, 남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고도 자기는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조롱하는 패역한 세대 속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리고 이중표는 죽음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생각컨대 이중표 목사의 한국교회에서의 최대 공헌은 한신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다. 호남 출신의 기장목사가 강남에 광야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도 아니다. 교회침체가 일상화된 오늘의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그것이 부럽고 신화처럼 보이겠지만 역사를 살린 것은 언제나 업적이 아니라 존재다. 그가 남긴 교회적 업적이 적지 않지만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삼지 않았다.

이중표의 한국교회에서의 공헌은 모두가 기피하는 죽음의 문제를 교회와 영적 삶의 중심에 두었다는 것이다. 신학의 서열에서 항상 종말론의 끝자락에 위치하던 죽음을 성경의 케리그마요 복음의 핵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종말에 있던 죽음을 현재로 앞당겼고 죄와 죽음의 고통속에 사는 세상을 향해 '당신들을 위해 죽은 분이 있다'고 소리치고, 복음의 이름으로 성공과 행복만을 좇아가는 자기애적 기독교를 향해서는 '죽어야 산다'고 외쳤다.
이윤재 우간다 선교사.

강남의 대형교회 목사가 죽음을 복음의 메시지로 선포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도 그는 한국교회의 외로운 선지자였는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외칠 뿐 아니라 또한 그렇게 살았다. 그가 죽자 그의 영적 친구 옥한흠 목사가 입관예배에서 한 눈물의 설교가 천국에 있던 이중표 목사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지 모른다. '이중표, 그는 잘 죽어서 잘 살았습니다'.

이중표 목사의 '죽음'은 그의 삶의 현장에서 배태되고 성장했다. 타고난 지병으로 그는 매 7년마다 수술대에 올라야 했고 그때마다 죽음은 그 앞에 바짝 다가왔다. 그에게 죽음은 언제나 친숙한 존재이며 동시에 언제나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날 눅9:31을 읽을 때 커다란 하늘의 우뢰소리를 들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에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이 말씀의 '별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임을 깨달은 그는 그때부터 '별세'의 메시지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별세의 복음이 가장 잘 고백된 것이 갈2:20인 것을 알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이 말씀이 그에게 준 감동과 깨달음은 이후 그의 인생과 목회를 송두리채 바꿔놓았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도 복음이다. 죽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기 위해 죽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그를 위해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내가 '그와 함께'(with) 죽고, 그가 내안에 살고(in), 나는 그를 위해 살고(for)...이 단순한 복음의 확신이 그로 하여금 죽음의 경계선은 넘어가게 했다. 확실히 이중표목사는 그때부터 달라져 있었다. 1987년으로 기억되는 이 전환점과 함께 시작된 전국목회자세미나는 그의 별세적 복음 선포의 장이 되었다.

이중표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완성'으로서의 죽음이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마지막', '마침'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죽음이 마지막이라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완성'이다. 창2:3에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고 하셨다. 여기서 '마쳤다'라는 말은 '끝냈다'(finished)라는 말이 아니라 '완성했다'(completed)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엿새동안 창조를 끝내고 더 할 일이 없어 쉬신 것이 아니라 창조를 완성하고 안식하셨다. 그래서 안식은 축제이다.

바울은 '달려갈 갈 길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4:7)고 한다. 그의 죽음은 다만 육체적 생명의 종결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소명의 완성이었다. 죽음이 다만 '끝내는 것'이라면 육체적 생명의 단절일 뿐이다. 예수님도 죽을 때 '다 이루었다'(요19:30)고 선언하셨다. 그의 죽음이 위대한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인류 구원의 사명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단지 생을 마쳤다는 의미의 죽음과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완성했다는 의미의 죽음은 어떻게 다른가? 이중표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한참 잘 나가는 때에 일찍 죽는 것이 억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 '할렐루야'하고 나직히 고백하며 숨을 거뒀다.

그에게 '할렐루야'는 무엇일까? 그의 죽음 1주기에서 그를 친형처럼 따랐던 이동원 목사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형님의 삶이 아름다웠지만 당신의 마지막 말이 '할렐루야'인 것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 기쁜 마음으로 할렐루야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그 마지막이 당신의 치열했던 67년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부럽고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도 형님처럼 할렐루야 하고 갈 수 있도록 살게 하소서'.

그렇다. 죽음은 완성이다. 완전이 아니라 완성이다.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에 죽지 않은 것처럼 또한 우리의 목숨이 끊어졌기 때문에만 죽은 것도 아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각자 주신 소명의 길이 완성되는 순간 영광의 왕관을 씌워주시는 승리의 순간이다. 완성으로서의 죽음은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인간이 품위를 잃지 않고 죽는 두 가지 죽음이 있다. 늙어서 죽는 것과 신념에 의해 죽는 것이다'(알버트 하버드). 우리가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스스로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다. 최소한 우리는 늙어서 죽거나 신념(순교같은)에 의해 죽어야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끓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으로서의 삶을 깨뜨리는 것이다. 어쩌다 때가 되어 죽는 것과 생의 소명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은 얼마나 다른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의 길이 마쳐지는 날에 우리 모두 할렐루야 하고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살자.

이중표의 죽음이 준 또 하나의 메시지는 '과정'으로서의 죽음이다. 이중표 목사가 평생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은 '별세하신 주님처럼 별세하라'였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에 감격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죽는 일에도 담대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추억에 붙잡혀 살 뿐(일명 '뱀파이어 신자') 자신이 주님을 위해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롬14:8). 이중표목사가 쓴 짪은 시가 그것을 보여준다.

씨앗은 싹을 내기 위해 껍질을 벗는다/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자기 꽃을 떨군다/열매는 씨앗이 되기 위해 스스로 썩는다/나비가 되기 위해 애벌레는 자기 죽은 무덤을 비단으로 남긴다/죽는 자만이 산다.

그리스도안에서 매일 죽는 삶은 2천년 교회사를 흘러온 영성의 맥이었다. 초대교회 순교 신앙, 수도자들의 자기부정, 프란치스코, 성 버나드, 에카르트, 토마스 아켐피스, 요한 타울러, 종교개혁 이후 존 오웬, 존 웨슬리, 잔느 귀용, 요나단 에드워드, 블레이너즈, 그리고 본회퍼에 이르기까지..이중표의 자기 죽음(별세)의 신앙고백은 한국교회 영성이 세계교회의 영성과 만나는 지점이며 우리가 주안에 있으면 시간과 공간을 떠나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렇다. 죽음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 오는 허무한 단절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소명의 완성을 향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과정의 연속이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죽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리스도안에서 죽다가 어느날 영원과 잇대어 질 것이다. 한번 밖에 없는 귀한 생명을 한순간에 버리는 이들때문에 우리 마음이 심히 아프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으로 이룰 속죄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속죄는 이미 이루어졌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날마다 죽어 우리의 허무한 죽음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죽을 때 죽지 않도록 죽기 전에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죽을 것이다'(엥겔스). 안타깝게 죽는 용기보다 매일 죽는 용기가 더 크지 않은가? 이중표목사가 돌아간 어느날 나는 그의 서재를 기웃거리다가 빛바랜 성경 한권을 발견했다. 성경을 열자 그 특유의 묵직한 먹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글은 죽음에 관한 그의 모든 신앙고백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