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대부 존 루이스 민주당 하원의원이 17일(현지시간) 향년 8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루이스 의원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을 이끌었던 ‘6인의 거인’ 중 한 사람이다. 생전의 루이스와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았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가 숨진 지 14시간 뒤인 18일 뒤늦게 조의를 표했다.
미 앨라배마주 트로이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루이스 의원은 15세였던 1955년 킹 목사의 라디오 연설을 듣고 흑인 인권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대학에 들어간 뒤 그는 학교·식당·화장실·극장·버스 등 공공시설에서 흑인과 백인이 한 자리에 있지 못하도록 분리하는 ‘짐 크로 법’ 반대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수차례 체포, 수감되기도 했다.
루이스 의원은 1963년 8월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 집회를 기획한 6인의 거인 중 한 사람이다. 이 집회에서 킹 목사의 역사적 명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가 나왔다. 킹 목사와 루이스 의원, 제임스 파머, 필립 랜돌프, 로이 윌킨스, 휘트니 영으로 구성된 6인 중 그는 마지막 생존자였다. 지난해 말 췌장암 4기 투병 사실을 알리며 극복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지만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루이스 의원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진 것은 1965년 3월 ‘피의 일요일’ 사건이었다. 당시 흑인 참정권을 요구하는 600여명의 흑인 시위대는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주도인 몽고메리까지 86㎞ 평화행진에 나섰다. 하지만 주 경찰은 셀마 시 경계에서 시위대를 폭력 진압해 강제 해산시켰다. 셀마 행진의 주도 세력이었던 루이스가 땅에 쓰러진 채 경찰관에게 맞아 피를 흘리는 모습이 TV로 전해지면서 흑인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전국적 이슈로 떠올랐다.
루이스 의원 등 흑인 시위대가 흘린 피는 그해 8월 린든 존슨 대통령이 흑인 참정권을 인정하는 연방 투표권법에 서명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1981년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시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 5년 뒤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2006년에는 민주당 하원 원내 수석 부총무를 지내기도 했다.
민주당은 지도부가 나서 추모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성명을 통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을 잃었다”며 루이스 의원의 사망을 공식 확인했다. 민주당 대선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도 “루이스는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고 있는 도덕적 잣대였다”고 추모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취임식 연단서 선서하기 전 나는 그를 껴안고 ‘당신의 희생 덕에 내가 이 자리에 와 있다’고 말했다”며 고인을 회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내 침묵하다 루이스 타계 소식이 알려진 지 14시간이 지나서야 추모에 동참했다. 그는 버지니아주 스털링에 위치한 자신의 골프클럽에서 골프를 친 뒤 뒤늦게 트위터에 “민권 영웅 존 루이스의 별세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겼다”는 짤막한 추모 메시지를 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생전 루이스 의원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다. 루이스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비판했고, 트럼프는 “루이스는 끔찍한 모습으로 망가지고 있는 자신의 지역구를 바로 잡는 데나 신경 써야 한다”고 조롱했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의 뒤늦은 추모에 “애도 메시지가 쏟아졌지만 거의 하루종일 트럼프의 목소리는 없었다”고 꼬집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