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좀비들을 거침없이 쓰러뜨리는 한 여인이 단번에 시선을 붙든다. 15일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영화 ‘반도’에서 강렬한 여전사로 변신한 배우 이정현 얘기다. 폐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민정(이정현)은 두 딸을 지키기 위해 극 중심에서 좀비들과 사투를 벌인다. 1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현은 침체한 극장가에 불고 있는 ‘반도’ 열풍에 대해 “너무 기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인데 영화계에 조금이나마 활력을 줄 수 있어 좋다”며 연신 행복해했다.
15일 개봉한 ‘반도’는 연 감독의 전작 ‘부산행’의 세계관을 잇는 블록버스터 좀비물이다. 원인불명의 좀비 바이러스가 부산행 열차를 덮친 지 4년이 흐르고 포스트 아포칼립스화 된 반도에서 사투를 벌이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2020년 칸 국제 영화제 공식 초청된 것은 물론 해외 185개국 선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세계적인 흥행을 예고하고 있다.
1999년 ‘와’로 전국에 테크노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배우 이정현에게는 20여년이 지금도 ‘테크노 여전사’라는 애칭이 곧잘 따라다닌다. ‘반도’는 그런 이정현이 ‘테크노 여전사’에서 ‘반도 여전사’로의 새 모습을 보여주는 자리이면서 블록버스터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는 작품이다. 이정현은 “액션은 처음이라 긴장을 정말 많이 했다. 감독님도 별말씀이 없으셨지만, 액션 스쿨을 몇 달 동안 다니면서 연습했다”고 떠올렸다.
카체이싱 등 주요 액션 장면이나 좀비들과의 혈투에서 여성을 중심에 세우는 ‘반도’에는 시대 정신이 녹아있다. 이정현은 “세대가 바뀌면서 캐릭터도 이야기도 정말 다양해졌다. 시나리오를 보고서 강인한 모성애로부터 강인한 전투력을 갖게 되는 민정의 역할에 공감이 많이 갔다”고 말했다. 지난해 결혼해 아직 아이가 없는 그는 “다섯 자매의 막내라 조카만 8명이다. 조카들 기저귀를 갈면서 자식처럼 키웠는데 그런 부분에서 배역이 더 납득갔다”고 말했다.
이정현은 가수 데뷔에 앞서 16살 때 ‘꽃잎’을 찍었다.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역사가 남긴 상처를 그린 이 영화로 이정현은 단숨에 충무로 기대주로 떠올랐지만, 촬영 현장은 미성년인 그에게 폭력적으로 여겨지는 부분도 많았다. ‘반도’ 현장은 액션 블록버스터임에도 액션스쿨에서 배운 걸 써볼 기회가 없을 정도로 편했다고 한다. CG분량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연 감독의 센스 덕분이기도 했다.
가령 100% CG를 통해 구현한 카체이싱 장면에서 연 감독은 사전 제작한 CG장면과 테스트 촬영분을 합성해 배우들의 이해를 도왔다. 이정현은 인터뷰 내내 연 감독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 이정현은 “연 감독님이 사전 제작에 정말 큰 노력을 쏟았다고 느꼈다. 감독님 머릿속에 있는 콘티가 너무 완벽해 간단한 동작을 오려 붙여도 강렬한 액션 장면이 나왔다”며 “구상한 걸 그대로 찍기만 하면 돼 촬영도 일찍 끝났다”고 전했다.
요리를 즐기는 이정현은 최근 예능 프로그램 ‘편스토랑’에도 출연해 화제를 모았었다. ‘반도’ 촬영 막바지 예능 제안이 들어왔다는 이정현은 “연 감독님께 출연 여부를 여쭤봤더니 흔쾌히 하라며 자신감을 심어주셨다”며 “주부 팬이 많이 생겨서 좋다”고 했다.
현재 이정현은 코로나19로 제작이 중단됐던 ‘리미트’를 촬영 중이다. ‘반도’보다 먼저 촬영한 신정원 감독의 복귀작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도 하반기 개봉할 예정이다. 가수로서 먼저 빛을 본 이정현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완성도 높은 작품에 꾸준히 출연해왔다. ‘꽃잎’ 이후 미성년이 맡을 역할이 제한적인 탓에 가수로 잠깐 길을 틀었지만, 가슴 속에는 늘 영화에 대한 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끊임없는 도전으로 이뤄낸 배우의 삶이기에 그의 연기 열정은 쉼이 없다. 이정현은 “아직도 해보고 싶은 장르들이 많다“고 했다.
“멜로를 포함해 어떤 장르든 들어오면 다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제안받은 시나리오들은 다 강한 이미지의 배역들이에요. (말랑말랑한 역할도) 좀 들어왔으면 좋겠어요(웃음).”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