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1월 영연방 국가인 호주의 고프 휘틀럼 총리가 영국 왕실이 임명한 존 커 총독에 의해 해임되는 일이 있었다. 호주 국민들의 자존심을 바닥에 떨어뜨린 일로 회자되는 이 사건을 두고 호주에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총리 해임을 지시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계속 제기됐다.
이 논쟁은 45년이 지난 2020년 7월 호주 정부 문서가 공개되면서 일단락됐다. 커 총독과 영국 왕실이 주고받은 211통의 편지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총리 해임을 지시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미국 CNN방송이 1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날 공개된 문서는 1200페이지에 달한다. CNN은 커 총독이 영국 왕실과 긴밀하게 접촉하긴 했지만 휘틀럼 총리 해임 건은 스스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비밀해제된 문서 중에는 커 총독이 “나는 여왕에게 알리지 않고 휘틀럼 해임을 결정했다. 왜냐하면 헌법상 책임은 나에게 있고 미리 알리지 않는 것이 여왕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적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
문서 공개는 호주 학술원의 제니 호킹이 2016년 국가기록원에 정부 문서 접근 허가 소송을 제기한 데 따른 것이다. 호킹은 커 총독이 재임 기간 영국 왕실과의 끈끈한 관계를 자랑했고, 그가 여왕과 주고받은 편지들은 여왕의 총리 해임 지시를 입증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커 총독과 영국 왕실 사이에 오간 편지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휘틀럼 총리 제거를 직접 명령했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
영국 왕실의 대리인이 연방 국가인 호주 총리를 해임한 것은 합법적인 일이다. 그러나 호주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노동당 출신의 첫 호주 총리인 휘틀럼은 재임 기간 대학 무상교육, 베트남전 철수, 사형제 폐지 결정 등 호주 사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2014년 타계했다.
커 총독은 당시 휘틀럼 총리 정부와 야당 관계가 장기간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휘틀럼을 해임하고 자유당 당수였던 프레이저를 과도내각 총리에 임명했다. 이 일로 호주와 영국의 관계는 오랫동안 경색됐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5년 11월 영국의 찰스 왕세자 부부가 호주를 방문했는데 호주 정가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했다. 당시 야당인 노동당의 빌 쇼튼 대표는 호주 역사상 전무후무한 총리 해임 사건 40주년이 되는 해임을 강조하며 공화제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