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사령관도 애도한 ‘친일파·전쟁영웅’ 백선엽은 누구?

입력 2020-07-11 11:59
휴전회담 한국대표를 역임한 백선엽 장군이 육군에 기증한 군 역사 관련 기록물 중 1951년 7월 10일 유엔 대표들이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가기에 앞서 기념촬영 하고 있는 모습. 휴전협정 당시 계급으로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기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해군 중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호디스 육군 소장. 연합뉴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은 11일 전날 별세한 백선엽 장군(예비역 육군 대장)에 대해 “진심으로 그리워질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라며 애도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이날 애도 성명을 내고 “주한미군을 대표해 백 장군의 가족과 친구에게 진심 어린 애도와 위로를 표한다”며 “백 장군은 종종 주한미군을 방문해 한국전댕과 군인으로서의 그의 경험을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백 장군은 오늘날 한미동맹을 구체화하는데 믿을 수 없는 공헌을 했다”고 한 그는 “6.25전쟁 당시 군인으로 복무하고, 한국군 최초 4성 장군으로 육군참모총장까지 한 백 장군은 영웅”이라고 강조했다.

한민족 비극의 역사인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당시 각각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평가받는 백 장군이 10일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1920년 평안남 강서에서 태어난 백 장군은 6.25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며 6.25전쟁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하고 조선인 독립군 토벌대로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이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위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간도특설대는 일제 패망 전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대상으로 108차례 토공 작전을 벌였고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다. 백 장군은 생전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적은 있지만 독립군과 직접 전투를 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백 장군이 1983년 일본에서 출간한 ‘대(對)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라는 책에는 간도특설대 활동이 반민족 행위였음을 시인하는 취지의 기술이 담겼다. 백 장군의 복무 시절인 1944년 7월, 9월, 11월 간도특설대가 무고한 조선인 등을 살해하거나 식량을 강탈했다는 등의 기록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에 담겨있기도 한다.

백 장군이 독립군을 직접 토벌했는 지의 진실은 결국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2년 남짓의 간도특설대 경력은 백 장군에게 친일파라는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백 장군은 해방 이후 육군 중위로 임관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대령)으로 재직했다. 1950년 4월 최전방 부대인 1사단 사단장이던 백 장군은 그해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즉각 사단 사령부로 이동해 부대를 지휘했다.

백 장군이 사령부에 도착했을 당시 이미 개성은 함락됐고, 사단은 궤멸 상태에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그해 8월 북한군의 남하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한 백 장군은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는 다부동 전투를 통해 북한군의 대구 진출을 막아냈다. 백 장군이 지휘하는 1사단은 경상북도 칠곡군 다부동에서 미군 부대를 피해 국군을 노린 북한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백 장군은 회고록에서 “내가 앞장서 싸우겠다. 만약 내가 후퇴하면 나를 먼저 쏘라”며 권총을 들고 병사들과 돌격을 했다고 회고했다.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의 예봉을 꺾은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고,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에 나섰다.

1사단은 1950년 10월 미 1기갑사단과 함께 합동작전을 펼쳐 가장 먼저 평양을 탈환했다. 6·25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백 장군은 미군들 사이에서도 전쟁영웅으로 불리게 됐다. 전쟁 중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한 백 장군은 1953년 1월 국군의 첫 대장으로 진급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당시 한국대표단으로 참석하며 6·25전쟁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천금주 기자 juju79@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