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보다 경찰들이 더 나쁩니다.”
흰머리가 무성해진 아버지는 31년 전 그 날을 떠올렸다. 1989년 7월 어느날, 초등학교 2학년이던 딸 김모(8)양은 귀갓길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화성 초등생 실종 사건’이라고 세간에 알려진 이 일은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 화성연쇄살인사건 주범 이춘재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실종’이 아닌 ‘살인’이었다.
아버지 김용복(69)씨는 7일 딸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 화성의 한 근린공원을 찾았다. 등산로 바로 옆 비탈진 산자락에 국화꽃 한 다발을 올려놓고 묵념했다. 이어 망연자실한 표정을 한 채로 앉아 울먹이다가 “너무나도 원통하다”는 말을 꺼냈다.
김씨는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 관계자들을 원망했다. 당시 경찰들은 김양의 유골 일부를 발견하고도 은닉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당시 수사관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감췄고, 뼈 한 줌조차 못 찾게 했느냐”며 “(이 근처가) 개발되기 전에 시신을 찾았더라면 뭐라도 발견했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민방위 훈련에 따라가겠다던 딸을 못 따라오게 하며 때린 게 지금도 후회된다”며 “딸에게 못 해준 것만 왜 그렇게 자꾸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또 “딸에게 별로 해준 것도 없고 힘들게만 한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뿐”이라며 “지금이라도 좋은 데서 편안하게 잘 지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날 헌화 현장에 참석한 김씨 측 법률대리인 이정도 변호사는 “경찰이 해당 수사관들에게 사체은닉 및 증거인멸 혐의를 적용했으나 공소시효가 만료돼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 점이 무척 아쉽다”며 “기존 판례를 살펴봤을 때 직무수행의 가능성이 있을 때까지는 공소시효가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만큼, 당시 수사관들의 직무유기 행위는 퇴임 때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경찰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이들에게 적용할 공소시효 범위를 더 유연하게 판단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화성 태안읍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1989년 7월 7일 낮 12시30분쯤 김양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실종된 일이다. 같은 해 12월 김양이 실종 당일 입었던 치마와 메고 있던 책가방이 인근에서 발견됐으나,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건 1년이 지나서였다. 김양의 물건이 발견된 태안읍 병정5리에서 불과 30여m 떨어진 곳에서 한 여중생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화성연쇄살인 9차 사건’이 발생하자 덩달아 화제가 된 것이다.
김씨는 딸이 사라진 뒤 두 차례에 걸쳐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이춘재를 용의선상에 올리지 않았다. 끝내 김양 가족의 요구를 묵살하고 사건을 ‘단순 실종’으로 종결했었다.
김양의 유류품이 발견됐다는 신고가 들어온 건 1989년 12월 21일이었다. 김씨가 참고인 조사를 받은 날은 같은 달 25일이다. 당시 경찰들은 21일과 25일 사이 김양의 시신을 발견했고 은닉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 발생 지역에 살던 한 주민은 “1989년 초겨울 형사계장과 야산 수색 중 줄넘기에 결박된 양손 뼈를 발견했다”고 증언했다. 이춘재의 자백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춘재는 “김양을 성폭행 뒤 살해했다”며 “범행 당시 양 손목을 줄넘기로 결박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경찰은 김씨와 김양의 사촌 언니의 참고인 조사에서 줄넘기 관련 질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내용으로 보아 유족들은 그때 경찰이 사건을 단순히 안일하게 처리한 것이 아니라, 고의로 숨기려 했다고 보고있다. 김씨와 가족들은 경찰의 증거인멸로 살해사건에 대한 실체규명이 지연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