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허용한 지난 1일(현지시간) 개헌 국민투표에서 대규모 표 조작이 있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공공기관 직원들이 투표를 강요당하고, 투표장을 감시하던 기자가 현지 경찰에게 폭행당했다고 로이터통신, 미 ABC뉴스 등 복수의 매체가 5일 전했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푸틴에게 2036년까지 집권 가능성을 제공하는 이번 개헌안의 찬성 비율은 77.9%이며 총 투표율은 65%였다.
선거 분석가들과 야당 정치인들은 이번 결과가 지지율 50%에 미치지 못한 앞선 여론조사들을 뒤엎는 것이라며 “전례없는 사기극”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유일한 비정부 여론조사 기관인 레바다 센터의 데니스 볼코프 부국장은 “최근 조사 결과 개헌 찬성 비율은 40%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주정부 기관 VT의 여론조사에서도 지난 5월 푸틴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28% 미만으로 2년 전 47%보다 크게 떨어졌다.
통계 전문가들도 투표가 조작됐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러시아의 저명한 과학자 세르게이 슈필켄은 이번 선거에서 8800만 표를 분석했다. 그 결과 투표율이 70%를 넘어선 지역에서는 개헌에 찬성하는 비율이 거의 100%대로 급증하는 ‘이상현상’을 발견했다.
예컨대 러시아의 강압통치를 받는 체첸 지역은 투표율 95%, 개헌 찬성율 97%를 기록했다. ABC뉴스는 “유권자들이 개헌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강요받은 사실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전했다.
슈필켄은 “전체 25%인 2200만 표가 부정투표됐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투표율은 65%가 아닌 44%로 추정된다”고 러시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러시아 유권자의 29%인 3100만명만 개정안에 지지했다”면서 “실제로는 개헌에 반대하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로이터 통신도 러시아 투표소를 자체 감시한 결과를 보도했다. 소속 기자들이 모스크바의 한 학교의 투표소를 7일간 감시한 결과 공식 투표율은 43%였다. 반면에 관찰자가 없던 같은 학교의 투표소 두 곳에서는 투표율이 85%가 넘었으며 인근 지역 투표율도 평균 83%에 달했다.
투표를 감시하다 폭행을 당한 언론인도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견된 기자는 투표 조작을 제보받고 취재에 나섰다가 경찰에 의해 팔이 부러졌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그밖에도 러시아 국영기업, 공기업 직원들은 사측으로부터 개헌에 찬성하도록 강요받거나, 온라인 투표권을 대리로 행사당했다고 내부고발하고 나섰다.
한편 러시아 선거관리위원회와 내무부는 이번 투표가 심각한 위반 없이 이루어졌다는 입장이다. 선거관리위원회 엘라 팜필로바 위원장은 선거 직후 브리핑에서 “투표는 공정하게 이뤄졌고, 결과는 믿을 만하며, 투표 결과의 정당성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발표했다.
이성훈 기자 tell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