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한양의 청계천은 인왕산·백악산·남산에서 시작됐다

입력 2020-07-03 11:15

서울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청계천(淸溪川)은 직장인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다. 청계천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성을 건립하기 전까지 이름없는 자연하천이었다. 태종대에 와서 정비가 시작되었으나 해마다 범람하여 물난리를 겪어야 했고 영조대에 와서 준천(濬川·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 바닥을 깊이 파냄)을 통해 정비되었다. 이어 일제강점기와 현대의 복개과정, 2005년 복원사업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한양은 ‘물의 도시’라고 불리었는데 어떤 물길들이 모여 청계천을 이루었을까?

청계천을 구성하는 주요 지천의 지형과 수계, 주요 공간의 역사와 공간변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연구보고서가 나왔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최근 5년간 청계천을 구성하는 주요 지천에 대한 연구성과를 종합해 기록한 청계천 지천연구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3일 밝혔다. 이번 연구대상 지천은 백운동천(白雲洞川),삼청동천(三淸洞川),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 흥덕동천(興德洞川), 창동천(倉洞川)으로 청계천을 이루는 주요 5개 지천이다.

백운동천은 청계천 지류 중 가장 길어 청계천 본류로 간주된다. 백악산 창의문 기슭에서 발원해 인왕산과 경복궁 서측 지역을 따라 흐른다. 근처 골짜기인 백운동(白雲洞)을 지나 백운동천으로 불렸다. 하천상에는 신교(新橋), 자수궁교(慈壽宮橋), 금청교(禁淸橋), 종침교(琮沈橋) 등 이름난 다리들이 위치했다.

백운동천 일대는 조선시대 국가권력 중심인 궁궐, 사직, 사당, 관청인 육상궁(毓祥宮)과 사직단, 경희궁이 주요 공간을 형성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통치시설들이 자리잡았다. 해방이후 상류지역에는 시민아파트, 중류지역에는 소규모 주택이 밀집되었으며 하류지역은 도심재개발에 의해 업무지구로 변모했다.

삼청동천은 백악산 동쪽 삼청동 계곡에서 발원하여 경복궁 동쪽과 중학(中學)앞을 흘러 혜정교(惠政橋)를 지나서 모전교(毛廛橋) 위에서 청계천으로 합류한다. 백운동천과 함께 청계천 상류를 이루는 중요한 지천이다. 조선시대 사학의 하나인 중학 앞을 지나기 때문에 중학천(中學川)으로도 불렸다. 삼청동천 주변으로는 왕실 관련 기관인 소격서(昭格署)와 종친부(宗親府), 사간원(司諫院)이 주요공간을 형성했다. 특히 경복궁 동측에는 조선시대 왕실 관련업무를 담당했던 종친부와 종부시(宗簿寺), 장생전(長生殿)이 시대별 변화를 거치며 위치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행정관련기관, 교육기관, 의료시설, 회사 및 관련기관이 집중적으로 배치됐다. 근대식 도시형 한옥이 신흥자본가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조선 사람들이 많이 밀집하여 거주한 지역이기도 했다. 해방이후에도 전통적 주거지역으로 개발이 억제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전통적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관광과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지역이다.

남소문동천은 남산기슭 남소영(南小營)부근에서 발원하여 장충단을 지나 광희동사거리 부근에서 두갈래로 갈라져 한쪽은 국립의료원 방면에서 청계천으로 합류하고, 다른한쪽은 동쪽으로 흘러 이간수문(二間水門)을 통해 성밖에서 청계천 본류와 합류했다. 남소문동천 주변에는 조선시대 한양도성과 군사시설인 남소문(南小門)과 훈련원(訓鍊院) 하도감(下都監)이 위치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애국선열 추모공간인 장충단(獎忠壇)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박문사(博文寺)가 주요공간을 형성하며 그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기 위한 다양한 근대시설이 자리잡게 된다. 일본인들의 유입도 진행되어 남소문동천을 경계로 서측지역은 일본인 거주지로, 동측인 광희문 인근은 조선인 거주지로 자리잡았다.

남소문동천은 다른 지천들과 달리 가장 늦게까지 복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이후 군사정권의 정치적 당위성을 얻기위한 반공과 호국, 민족과 세계화라는 키워드로 기념비, 동상, 국립극장, 자유센터 등이 세워졌다. 1980년대 이후 하류에는 동대문시장을 중심으로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도매시장이 형성됐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생기며 패션과 디자인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고 한양도성 발굴과 복원이라는 역사성 회복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흥덕동천은 도성의 동북부를 흐르는 지천으로 서울국제고와 서울과학고에서 발원한 두 물줄기가 혜화로터리 부근에서 성균관을 감싸 흐르는서반수와 동반수와 합쳐져 대학로, 효제동 일대를 거쳐 청계천으로 흘렀다. 흥덕동천 주변으로는 흥덕사(興德寺), 성균관과 반촌(泮村), 경모궁(景慕宮), 하어의궁(下於義宮), 연동교회, 어영청(御營廳)이 주요공간을 형성한다. 흥덕동천일대 공간은 조선시대부터 교육 중심지 역할로 국가 핵심기관인 성균관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소학교에서 제국대학까지 다양한 교육기관이 생기며 여전히 교육기관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대학천(大學川)으로도 불렸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주변 지역에 건설되었던 관사(官舍)들은 이후에도 공무원의 관사로 사용되었다. 1920년대말부터 상류에는 혜화동 문화주택이 일제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며 1930년대에는 하류지역에 조선인 주도의 한옥주택이 자리잡았다. 해방이후 낙산일대에 생성된 토막촌이 한국전쟁을 거친 후 국민주택으로 재개발되었다. 1975년 서울대 이전으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들어오면서 마로니에공원이 조성되었고, 소극장들이 많이 생기면서 다양한 연극제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대학로는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창동천은 남산의 서쪽 백범광장 인근에서 발원하여 남대문시장과 시청 동쪽을 흘러 청계천으로 합류한다. 창동천 주변으로는 남별궁(南別宮)과 대관정(大觀亭), 저경궁(儲慶宮), 선혜청(宣惠廳), 태평관(太平館)과 선무사(宣武祠)가 주요공간을 형성했다. 창동천 일대의 공간은 상류와 하류로 나뉘어진다. 상류지역은 조선시대 구휼 상징인 선혜청이 있었던 지역이 1897년 근대 상설시장인 창내장(倉內場)이 남대문시장으로 변화하며 상업공간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하류지역은 조선시대 외교공간이었고,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정치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남별궁 등 외교공간이 있었던 이 일대에 대한제국기 경운궁과 함께 환구단(圜丘壇)과 대관정이 건립되고 이에 따라 소공로가 조성되며 변화를 겪게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환구단이 철도호텔로, 대관정이 하세가와 관저와 경성부립도서관으로 변화되었다.

청계천박물관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개천(開川)에서 20세기의 복개된 청계천과 복원된 청계천에 이르기까지 청계천과 그 주변지역의 장소와 시대, 기억을 저장하고 전시하는 도시박물관이다. 이번 사업은 청계천과 주변지역의 역사와일상을 심층적으로 기록하는 조사연구사업으로, 청계천을 구성하는 주요지천의물길과 지형, 역사와 주변지역의 도시공간 변천을 역사학, 도시학, 지리학의 학제간 연구로 진행하였으며 그 성과를 정밀한 지형과 지적위에 중첩하여 실증적인 도면으로 기록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송인호 관장은 “이번 보고서를 통해 도성내 곳곳에 흐르며 청계천 본류를 구성했던 주요 지천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향후 청계천과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연구사업으로 ‘청계천기획연구’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청계천 지천연구 보고서는 향후 서울 도심의 청계천 지천복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청계천 지천연구 보고서는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또는 서울역사자료실에서 열람할 수있 다. 또 서울책방홈페이지)에서 구매 할 수 있다. 가격은 2만원.

김재중 선임기자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