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옮기고 용기낸 숙현이, 농담도 건네고 밝았는데…”

입력 2020-07-03 00:03
트라이애슬론 한국 국가대표와 청소년 대표로 뛴 고(故) 최숙현 선수가 2013년 전국 해양스포츠제전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고인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 연합뉴스 이용 의용실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한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국가대표 故 최숙현 선수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묵직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꿈많던 23세 청년은 그날의 고통을 떠올렸다.

최 선수는 2017∼2019년 경주시청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잊을 수 없는 가혹행위를 당했다. 그가 남긴 녹취록에 따르면 소속팀 감독과 팀 닥터, 일부 선배들은 상습 폭행과 괴롭힘, 갑질 등을 자행했다. 체중 관리에 실패하면 곧장 서슬 퍼런 손찌검이 날아왔고, 20만원어치의 빵을 억지로 먹게 하기도 했다. 국가대표 선수가 겪은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인간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올 1월 1일부로 부산시로 팀을 옮기고, 선수로서 새 출발을 다짐했다. 지난 2월에는 용기를 내 관계 기관에 피해사실을 알리고, 경주경찰서에 소속팀 지도자 등 4명을 폭행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경주시는 부랴부랴 해당 감독과 일부 선수를 상대로 기초 대면조사를 했지만,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입장이 바뀌었다. 경주시 관계자는 2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진술이 엇갈렸다. 경찰 조사 결과에 따라서 처분 결정을 내리려고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경찰 조사 중이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최 선수에게 남는 건 절망이었다.

최 선수를 마지막으로 지도했던 박찬호 부산시체육회 트라이애슬론팀 감독은 통화 내내 그를 ‘숙현이’로 불렀다. 왠지 모르게 어두워 보이던 ‘숙현이’가 차차 안정을 찾고 웃고, 농담할 때는 기분이 좋았다며 그를 추억했다.

국민일보는 2일 트라이애슬론 청소년대표팀 수장이기도 한 박 감독과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한국 트라이애슬론의 희망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기까지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한다. 다음은 박 감독과의 일문일답이다.

경북 경주시체육회가 2일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국가대표 故 최숙현 선수가 지도자와 선배들의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감독의 직무를 정지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2월 6일 최 선수의 아버지가 경주시에 민원을 제기한 지 5달 만에 나온 결과다. 연합뉴스 사진은 경주시체육회 전경.

-최숙현 선수의 죽음을 접하고, 현 소속팀 감독으로서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숙현이가 지난 1월 저희 팀에 옮겨오면서 이전 팀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힘이 되어주기 위해 더 신경 썼지만, 과거에 이 정도로 힘든 일을 겪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 소속팀이었던 경주시청 감독과 팀 닥터는 가혹 행위를 전면 부인했다

“저는 경주시 감독과 스타일이 다르지만 상대 코칭스타일을 존중하고 평가해왔다. 숙현이가 오랫동안 경주시청팀에 있었는데 그 팀은 ‘스파르타식’ 코칭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정도로 폭행이라든지, 가혹 행위가 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팀 닥터도 과거에 만난 적이 있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오히려 만약 감독이 (선수들에게) 잘못된 행동을 하면 말릴 사람이라고 여겼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 드러나 ‘이 사람이 그 사이 변한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최 선수는 중학생 때부터 가해자인 감독에게 지도를 받았다

“철인3종경기는 어릴 때 선수를 발굴해서 지도해 성인 선수로 커가는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하면 그 감독의 애제자라고 볼 수도 있다. 저도 어릴 때부터 키운 선수들이 지금은 잘 성장해서 다른 지역 실업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런 선수들은 스승의날 때 꼭 연락이 오고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다. 가혹 행위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 이유다.”

2일 오후 경북 경주시 황성동 경주시체육회 사무실에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 감독이 나오고 있다. 경주시체육회는 인사위원회 청문 절차를 밟고 해당 감독에 대해 직무 정지를 결정했다. 연합뉴스

-녹취록을 보면 체중을 가지고 가혹 행위를 하는 대목이 대부분이다. 선수 본인의 스트레스가 컸을 것 같다

“철인3종경기에서 체중은 경기력과 밀접하게 관련된 부분이다. 체중 관리는 먹는 게 원인이지만,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많이 받을 때 호르몬 반응에 의해서 나오는 경우도 많다. 학문적 견해(박 감독은 2007년 트라이애슬론 선수의 회복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 보유)로 생각해볼 때 숙현이가 애초부터 스트레스 때문에 체중을 관리하기 힘든 몸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최 선수가 1월 1일 자로 부산시로 이적했다. 팀을 옮기기까지의 과정을 알고 싶다

“실업팀 선수들은 매년 전국체전이 끝나고 10월쯤 팀을 옮기는 경우가 잦다. 이유는 기존 팀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훈련을 하고 싶다든지, 성적이 안 좋아서라든지 등 다양하다. 저는 경주시 팀과는 다른 지도 방식을 갖고 있다 보니 선수가 편한 마음을 갖고 다시 운동하고 싶어 부산으로 팀을 옮겼다. 팀을 옮기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최 선수와 부모님을 경주에서 만났다. 우리 팀은 여러모로 경주만큼 좋은 여건은 안되지만,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지도해보겠다고 약속을 하고 데려오게 됐다.”

-주변인들은 최 선수가 팀을 옮긴 뒤에도 왠지 모르게 낯빛이 어두웠다고 하더라. 그래도 새 팀에서 함께 ‘으쌰으쌰’ 해주면서 힘을 불어넣어 줬다고들 하더라

“예전부터 숙현이를 알고 있었다. 숙현이가 고등학생 시절 청소년 대표를 지냈는데 당시 저는 그 팀의 감독을 맡고 있었다. 유망주 선수들이 잘 성장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서 숙현이도 그런 의미에서 잘 지도해보고 싶었다. 사실 숙현이가 부산시 팀에 와서는 저한테 농담할 정도로 꽤 밝아지기도 했다. 감독에게 장난을 치는 게 쉽지 않은데 여기 온 지 한 달쯤 됐을 때 훈련을 20여 분 앞두고 갑자기 ‘감독님, 저희 강원도로 스키 타러 가요’라고 메시지가 오더라.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하니 주변에서 선수들 웃는 소리가 나고, 숙현이도 웃으면서 ‘농담이에요, 감독님’ 그러더라. 저는 숙현이가 웃고 그러는 모습이 참 좋았다. 또 최근에는 반려견 모임도 했다. 숙현이도, 저도, 선수들도 반려견을 키운다. 각자 반려견을 데리고 모임도 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아마도 피해 사실을 옆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다.”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국가대표 출신 故 최숙현 선수가 2013년 전국 해양스포츠제전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 연합뉴스

-최 선수가 어깨 부상이 심한 상태였다고 알고 있다. 병원에도 직접 데리고 다닌 게 사실인가

“선수 상태를 알기 위해 경주시 감독에게 물어보니 단순 탈골이라고 하더라. 숙현이한테도 물어보니 3년 전 부상을 당해 탈골이 잘 된다고 얘기했다. 어깨 전문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생각보다 부상 상태가 심하다고 하더라. 수술이냐 재활치료냐를 결정해야 하는데 숙현이가 경주시 팀에 있을 때도 재활치료를 하면 잘 뛰었으니까 우선 재활을 하고 9월 전국체전을 마친 뒤에 수술하겠다고 하더라.”

-박 감독은 1987년 철인3종경기에 입문한 국내 이 분야 선구자인 동시에 왕고참이다. 이번 일이 더 안타까울 것 같다

“우리 종목에서만큼은 이런 일이 없고, 후배 지도자들이 참 열심히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트라이애슬론은 선진국에서 먼저 유행했고, 적어도 국민소득 3만5000달러 이상일 때 활성화하는 종목이다. 지도자들을 비롯한 철인3종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제는 그 수준에 맞는 행동이 필요하다. 특히 지도자들은 훈련은 철저하게 할지라도 그 외에는 선수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