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애슬론(철인3종) 선수였던 고(故) 최숙현씨의 극단적인 선택은 체육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최씨가 생전에 모바일 메신저로 어머니에게 털어놓았던 폭력과 가혹행위 피해를 전해들은 국가대표들은 “지금도 이런 식으로 선수를 관리하는 지도자가 있느냐”며 울분을 터뜨렸다. 대한철인3종협회는 ‘단호한 조치’를 약속하고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 중 하나로 지목된 최씨의 생전 지도자는 연락이 두절됐다.
청와대 홈페이지에선 국민청원이 시작됐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 아이디를 사용하는 한 청원자는 2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트라이애슬론 유망주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제목으로 최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들을 일벌백계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 청원자는 “23세의 어린 선수가 꿈을 펼쳐 보기 전에 별이 돼 떠났다. 우리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에 나온 ‘그 사람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며 “최숙현 선수는 운동을 좋아했다. 피, 땀,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 정신을 동경했다. 감독, 선배, 팀닥터는 그렇지 않았다. 슬리퍼로 얼굴을 치고 갈비뼈에 실금이 갈 정도로 구타했고 식고문까지 자행했다”고 적었다.
이어 “(최씨가) 참다못해 고소와 고발을 하자, 잘못을 빌며 용서해 달라는 사람이 정작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모르쇠로 일관하며 (가해를) 부정했다. 최숙현 선수는 이런 고통과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관계자들을 일벌백계하고 최숙현 선수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폭언과 폭력을 근절하고, 고통받는 젊고 유능한 선수들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간결하지만 비교적 상세하게 상황을 나열한 글의 내용을 볼 때, 청원자는 최씨의 주변인일 가능성이 있다. 이 청원은 낮 12시50분 현재 2만4400명의 동의를 얻었다.
봅슬레이·스켈레톤 국가대표팀 감독 출신인 이용 미래통합당 의원은 앞서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씨의 사망 사건을 알리면서 “대한체육회, 대한철인3종협회, 경북체육회, 경주시청, 경주경찰서에서 그 누구도 고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철저한 수사와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촉구한다. 고인에게 폭언·폭행을 일삼은 자들이 있다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씨는 지난달 26일 오전 부산 소재 숙소에서 사망했다. 최씨의 생전 나이는 23세. 소속팀은 경북 경주시청이었다. 이 의원은 “최 선수가 숙소 건물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또 최씨가 어머니에게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줘’라고 마지막으로 발송한 모바일 메시지 내용도 공개했다. 유족은 ‘그 사람들’을 소속팀 감독, 팀닥터, 선배들로 보고 있다.
알려진 가혹행위의 사례를 종합하면, 최씨는 복숭아 1개를 감독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했고, 체중 조절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흘간 단식했으며 슬리퍼로 뺨을 맞았다. 빵 20만원어치를 강제로 먹는 ‘식고문’도 자행된 것으로 전해졌다.
최씨에게 가해진 가혹행위 내용을 접한 선수들은 종목을 가리지 않고 울분을 터뜨렸다. 다른 종목에서 올림픽을 두 차례 경험했던 한 30대 베테랑 국가대표는 “지금도 이런 식으로 선수의 체력·체중 관리를 하는 팀이 있다니 충격을 받았다. 나보다 선배 세대의 과거에도 이 정도의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말했다.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는 지난 4월 8일 최씨로부터 폭력 신고를 접수하고 여성 조사관을 배정했다. 이 사건은 경북 경주경찰서의 조사가 마무리된 뒤 지난달 1일 대구지검으로 넘어갔다. 경주시체육회는 이날 오후 2시 체육회에서 운영위원회를 열고 산하 직장운동부 트라이애슬론팀 감독, 선수들을 불러 경위를 조사한다.
다만 이 팀을 지휘하는 감독은 현재 휴대전화 전원을 꺼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최씨의 모바일 메시지에서 ‘그 사람들’ 중 하나로 지목된 지도자다. 오전 11시40분쯤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연결음이 들렸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고, 곧바로 다시 걸었을 땐 전원이 꺼졌다.
박석원 대한철인3종협회장은 협회 홈페이지에 입장문을 내고 “고 최숙현 선수가 겪었을 고통과 괴로움을 생각하면 협회장으로서 참담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협회는 이번 사건을 매우 엄중하게 보고 있으며 스포츠공정위 심의에 따라 협회가 할 수 있는 빠르고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 희망의 전화 ☎129 / 생명의 전화 ☎1588-9191 /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김철오 조효석 이동환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