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마 ‘이춘재’ “사건 수사기록도 바로 잡았다”

입력 2020-07-02 13:36 수정 2020-07-03 07:41

“범행 시간이 새벽이 아니라 퇴근 후 저녁에 저질렀다”(연쇄살인 1차 사건)
“원래 입었던 속옷은 자신이 가지고 가고 방에 있던 속옷을 (피해자에게)입혔다”(연쇄살인 8차 사건)
1980~1990년대 경기도 화성군 일대에서 부녀자들을 연쇄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우리나라 강력범죄 사상 최악의 장기미제사건인 이른바 ‘이춘재(57)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경찰의 재수사가 마무리됐다.

이춘재의 첫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한 1986년 이후 34년 만이고 경찰이 재수사를 시작하고 거의 1년 만이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가혹하고 잔인한 이춘재의 범행 전모가 밝혀지고 당시 검찰과 경찰의 가혹행위와 시신은닉 등 민낯이 드러났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이들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찰도 지난해 재수사를 시작하면서 현행법상 이춘재에 대한 처벌은 불가하다는 점을 인정하며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위해 수사를 완료하겠다고 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배용주 청장은 2일 본관 5층 강당에서 브리핑을 열고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은 이춘재가 14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다른 9명의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과 강도질을 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또 사건은폐, 감금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수사를 했던 당시 검찰 직원과 경찰관 9명을 검찰에 넘겼다.

이춘재는 1986년 9월 15일부터 1991년 4월 3일까지 화성에서 잇따라 발생한 10건의 살인사건을 모두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여기에다 1987년 12월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 1989년 7월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1991년 1월 청주 여고생 살인사건, 1991년 3월 청주 주부 살인사건 등 4건의 살인사건도 이춘재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특히 1차 사건의 경우, 이춘재는 수사기록에 있는 사건 발생 시간이 새벽이라고 돼 있는데 ‘아니다’며 ‘퇴근 후 저녁’이라고 했고 경찰도 조사를 통해 인정했다.

또 진범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8차 사건의 경우는 속옷과 관련 이춘재가 “피해자가 입었던 옷은 자신이 가져 가고 방안에 있던 속옷을 (피해자에게) 입혔다”고 했다.

이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화성 태안읍 박모씨 집에서 딸(당시 13세)이 성폭행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으로 이듬해 윤모(53)씨가 범인으로 검거돼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됐다.

현재 윤씨는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현재 수원지법에서 재심이 진행 중으로 속옷 부분 진술에서 윤씨와 이춘재는 전혀 다르다.


경찰 관계자는 “이춘재는 내성적 성격으로 자기 삶에서 주도적 역할을 못 하다가 군대에서 처음으로 성취감과 주체적 역할을 경험한 뒤 전역 후에는 무료하고 단조로운 생활로 인해 스트레스가 가중된 욕구불만의 상태에 놓였다”며 "“결국 욕구 해소와 내재한 욕구불만을 표출하고자 가학적 형태의 범행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내용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이춘재는 프로파일러들과 지난해 9월 24일 부산교도소에서 네 번째 면담을 갖던 중 이러한 살인 범행 전체를 자백했다.

그는 자백 당시 1994년 1월 처제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부산교도소에서 수감 중이었다.

이춘재는 살인 말고도 34건의 성폭행 또는 강도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경찰은 일부 살인사건 피해자들 유류품에서 나온 이춘재의 DNA 등 증거를 토대로 14건의 살인 범행은 모두 그가 저지른 것으로 결론 내렸지만, 다른 사건들의 경우 뚜렷한 증거가 없고 일부 피해자는 진술을 꺼려 확실한 피해자 진술을 확보한 사례만 그의 소행으로 결론 내렸다.

이에 따라 추가 성폭행·강도 등 나머지 25건 범행은 그의 범죄 혐의에서 빠졌다.

이춘재는 이토록 잔혹하고 많은 범행을 한 동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을 하지 않았지만, 경찰은 수십차례에 걸친 프로파일러 면담 결과 등을 토대로 그의 범행 동기를 ‘변태적 성욕 해소’로 판단했다.

경찰은 이 사건이 벌어지던 당시 검찰, 경찰 등 9명도 입건해 이춘재와 함께 검찰에 송치했다.

이들은 8차 사건과 화성 초등학생 실종 사건 수사와 관련해 각종 불법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8차 사건 담당 검사와 경찰 수사과장 등 8명은 범인으로 지목한 윤씨에 대해 임의동행부터 구속 영장이 발부되기 전까지 아무런 법적 근거나 절차 없이 75시간 동안 감금하고 잠을 재우지 않는 등 가혹행위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화성 초등학생 실종 사건을 맡았던 형사계장 A씨 등 경찰 2명에게는 김양의 유골 일부를 발견하고도 은닉한 사체은닉 및 증거인멸 혐의가 적용됐다.

하지만 8차 사건과 화성 초등학생 실종 사건으로 입건돼 검찰에 넘겨진 검찰과 경찰은 자신들의 혐의를 대부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춘재와 당시 검찰, 경찰 등을 공소시효 만료로 인한 '공소권 없음' 의견으로 송치했고 검찰도 같은 방식으로 이 사건을 최종 처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브리핑에 나섰던 배 청장은 수사 한계 등을 고려한듯 “이춘재의 잔혹한 범행으로 희생되신 피해자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분들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분과 그의 가족, 그 외 당시 경찰의 무리한 수사로 인해 손해를 입으신 모든 분께 사죄드린다”고 말하며 머리를 숙였다.

수원=강희청 기자 kangh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