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관중석 메아리만…‘코로나 시대’ 축구장 아나운서의 하루

입력 2020-07-03 11:00
아나운서 듀오 '투맨'의 한기환(왼쪽), 동환수 아나운서가 지난달 28일 경기도 수원 팔달구 수원월드컵경기장 방송실에서 경기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수원=최현규 기자

“경기장은 사람도 없이 탁 트여 있는데…느낌은 너무 답답해요.”

20여 년 넘게 함께 일해온 동갑내기 동환수, 한기환(이상 52) 아나운서는 홈경기를 앞둔 지난달 28일 수원월드컵경기장의 방송실 밖 관중석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국내 프로축구에서 가장 두꺼운 팬층을 자랑하는 명문 구단 수원 삼성의 장내 아나운서다. 2003년부터 18년째 일해오면서 팀의 즐겁고 아픈 시절을 모두 함께했다. 둘의 아나운서 듀오 명칭인 ‘투맨(Two men)’은 수원 팬들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그러나 K리그에서 별의별 일을 다 겪은 둘에게도 이번 시즌은 낯설다. 이번 시즌이 개막한 뒤 두 사람이 경기장에서 볼 수 있는 건 구단 직원들과 취재 기자들뿐이다. 모든 구단 이벤트가 취소되면서 감독이나 선수도 만날 수 없다.

장내 아나운서 본연의 역할은 경기장에 온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다. 두 사람은 이날도 수십 년간 그래왔듯 경기 4시간 전 홈구장에 미리 도착해 그날 계획을 다듬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사람들에게 어떤 재미를 줄지, 이벤트는 어떤 식으로 할지를 고민했겠지만, 그런 고민이 필요 없어진 요즘 그들의 회의는 다소 맥이 빠져있다. 관중이 입장할 때 방송 스태프가 제 위치에 가도록 하는 ‘개문(開門) 10분 전 방송’도 해야 하지만 이제는 의미가 없다. 한 아나운서는 “물론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우리 역시 수원 팬”이라면서 “아무도 없는 경기장에서 둘만 응원하는 것 같아 허전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남자프로농구 KBL 서울 삼성의 장내 아나운서를 했던 경험도 있다. 때문에 축구 응원문화의 특별함을 잘 안다. 한 아나운서는 “축구 응원은 전자음이 들어가는 다른 종목과 달리 관중의 함성 비중이 가장 크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수원은 서포터의 힘이 크다. 팬들 덕에 수원 축구만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면서 “어느 순간 매 경기가 연습경기로 변해버린 느낌”이라고 말했다. 전부터 경기장에 내보낼 응원가를 선곡해왔던 그들은 이제 팬들의 함성을 흉내 낸 백색소음까지 내보내려 머리를 싸매야 한다. 홈경기 하프타임마다 잔디로 내려가 수만 명의 함성을 온몸으로 느끼던 것도 이제는 아득한 옛일 같다. 동 아나운서는 “선수들은 시합에, 기자들은 취재에 집중하면 되지만 우리는 관중들을 즐겁게 하는 게 일”이라며 “‘사람 뽕’이 그립다”고 덧붙였다.

팬들의 응원이 없어 힘이 빠진 수원은 리그 순위표 끄트머리에서 부진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이 내다본 관중석에는 팬들이 전날 걸어둔 응원 걸개가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동 아나운서는 “요즘 같으면 진 경기 다음 날 저걸 걷을 때마다 얼마나 속상할까 싶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방송 시청자 수야 늘었겠지만 직접 체감하기에는 팬들 사이에서 K리그를 향한 관심이 오히려 많이 떨어진 걸 느낀다”면서 “중계 현장감이 떨어지는 국내 환경상 경기장에 와서 직접 눈으로 봐야 눈으로 보면서 화를 내든 기뻐하든 할 텐데, 처음이야 다 챙겨보겠지만 한두 경기 빠뜨리기 시작하면 축구를 잊고 일상에 젖을 게 뻔하다. 그런 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두 사람에게 수원은 단순한 직장이 아닌,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함께 한 곳이다. 젊은 시절에는 경기가 끝나면 인근 아주대 옆의 맥줏집에서 팬들과 술잔을 기울였던 기억이 있다. 팬들의 결혼식 사회를 본 추억도, 집들이에 초대받아 찾아갔던 일화도 자녀들이 장성한 지금은 다 옛이야기지만 기억 속에 선명하다. 동 아나운서는 “수원의 장내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온갖 행사를 다 해봤지만 다른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수원 축구와 함께하는 동안 너무 재밌었다”면서 “우리가 수원과 함께해온 건 남들이 아닌 스스로에게 ‘18년 동안 가장 잘한 일’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긍지”라고 설명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날 문화체육관광부는 제한적으로 프로스포츠 관중 입장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수원은 이르면 다음 홈경기인 19일부터 관중들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이 역시 나름대로의 걱정거리다. 서로가 떨어져 앉은 팬들이 전처럼 흥겨운 마음으로 어울려 함성을 내지를 수 있을지부터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아나운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도 궁금하지만 일단 이런 상황에도 경기를 보러 와주는 관중들을 보면 눈물부터 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구단이 정말 경기를 보러올 팬들에게 잘해야 한다. 그래야 축구를 잊어버린 사람들도 다시 수원의 축구를 기억할 것”이라면서 “축구를 더 잘하면 좋겠지만 하루아침에 그렇기 어렵지 않겠나. 보러 와준 분들이 1000명이 아니라 100명일지라도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걸 깨닫고 감사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원=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