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다 살아난 백남준이 유치원 여친에 보낸 드로잉엔

입력 2020-06-30 15:34 수정 2020-06-30 16:03
1996년 가을, 서울에 사는 수필가 이경희(88)씨에게 소포꾸러미가 배달된다. 발신자는 뉴욕의 백남준(1932∼2006) 작가. 둘은 유년 시절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애국유치원을 함께 다녔다. 한국을 떠난 지 35년만인 1984년 금의환향하듯 한국을 찾은 백남준은 김포공항에서 기자들에게 “유치원 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고 했었다.

꾸러미 속에는 사진에 백남준이 뭔가를 휘갈겨 쓴 73장의 드로잉이 들어있었다. 일종의 그라피티 아트라고나 할까.

백남준은 왜 이걸 소꿉친구에게 보냈을까. 시점이 중요하다. 그해 봄 뇌졸중으로 쓰러진 백남준은 재활 치료 끝에 회복에 성공했고, 이후 시도한 첫 작품이 그것이다. 백남준은 비디오 설치 앞의 누드 퍼포먼스 이미지, 할아버지의 장례식 이미지, 존 케이지 등과 함께 활동하던 젊은 날의 사진 이미지 등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 사진의 여백 위에 글자를 썼다. ‘자, 밥 먹자’ ‘기동차를 타고 뚝섬에 원족(소풍) 가자’ ‘칙칙폭폭 기차가 떠난다’ ‘뚱뚱보’ 등등. 이 문장은 두 사람만이 아는 유년의 기호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뚱뚱보는 백남준의 동갑내기 사촌을 말한다. 둘은 그렇게 그를 놀려먹었던 것이다.

세계적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에게는 글로벌 노마드족의 면모가 강했다. 하지만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한 후의 세계관은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자신이 태어난 본향에 대해 끌림이 생겨났을 테고, 그것이 유년의 친구 이경희를 소환하며, 이런 부류의 작품 탄생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책 표지.

백남준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지금껏 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고, 앞으로도 다시 하지 않을 거야.” 2010년 포항시립미술관 개관 기념전 때 처음 공개된 그 소묘가 이번에 ‘백남준의 드로잉 편지’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나왔다. 책은 태학사와 도서출판 광장에서 함께 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