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성추행도 횡령도 ‘쉬쉬’… 대학원생들 ‘교수갑질’ 눈물

입력 2020-06-28 16:10


서울의 한 음악대학원에 다니던 A씨는 2015년 10월 연주회 뒷풀이에서 지도교수 B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당시 A씨는 취한 B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대리기사가 운전하는 차에 함께 탔다. 이곳에서 B씨는 갑자기 A씨 얼굴에 입을 맞췄다. A씨는 저항했지만 B씨의 완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B씨는 “가만히 있어봐, 나랑 놀자, 이리와 봐”라며 A씨의 몸 곳곳을 더듬기까지 했다.

A씨에 따르면 평소에도 그는 B씨의 수행비서 노릇을 했다고 한다. 좁은 음악계 인맥 탓에 B씨 부인과도 친분이 있었던 A씨는 회식자리에서 B씨가 술에 취하면 그의 부인에게 실시간으로 상황보고를 하곤 했다.

성추행과 사적 업무 지시라는 두 가지 ‘교수 갑질’을 동시에 당한 위 사례는 사건이 발생한 지 4년이 흐른 지난해에야 ‘미투(#Metoo·성폭력 고발)운동’ 덕분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사건은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학원생의 갑질 수난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최근에도 서울대 음대 교수가 제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직위해제된 데 이어 고려대 의대 교수도 학생들에게 성추행과 폭언을 일삼았던 것이 밝혀졌다. 대학원생들의 인권 보호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28일 국민일보가 대학원생 인권단체 ‘대학원생119’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12월부터 이달 중순까지 이 단체에 제보된 대학원생 피해 건수는 모두 105건에 이른다. 단일 사건에서 동시에 발생한 사례를 합치면 216건에 달한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피해 사례는 폭언·폭행으로 32건(14.8%)이었다. 연구비 횡령 29건(13.4%), 논문투고 방해·졸업지연 28건(13.0%), 연구부정·저작권 강탈 25건(11.6%), 임금체불·무보수노동 21건(9.7%), 사적 업무 지시 13건(6.0%), 성희롱·성폭행 11건(5.1%) 등이 뒤를 이었다.

유형별로 사례를 들여다보면 갑질에 취약한 대학원생의 고달픈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 제보자는 최근 5년간 자신의 통장에 입금된 자신과 동료들의 인건비 8000만원을 교수에게 바쳤다. 교수가 연구원들의 인건비 통장을 모두 관리하게 한 뒤 일정액이 쌓이면 자신의 통장으로 입금시키도록 했기 때문이다. 교수는 최대한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현금으로 찾아 본인의 통장에 입금시키도록 지시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다른 제보자는 교수의 자녀가 유치원생일 때는 등·하교를, 초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그림일기를 맡았다. 중·고등학생인 교수 자녀의 독후감을 쓴 대학원생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공론화되지 않은 사례를 감안하면 훨씬 더 많은 갑질이 행해졌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얘기다. 지난해까지 서울의 한 대학에서 조교 생활을 했던 30대 최모씨는 “교수 요청으로 장례식장에 가서 도우미 노릇을 하고, 학업에 방해될 정도로 일이 많아도 참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최씨의 당시 월급은 40만원이었다.

그럼에도 대학원생들은 자신이 당한 피해가 공론화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2월 펴낸 ‘대학 내 폭력 및 인권침해 실태와 개선방안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대학원생들은 무고죄에 대한 공포, 낙인, 보복에 민감했다. 특히 폭언이나 성폭력은 증거물 확보가 어려워 본인이 ‘역풍’을 맞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교내에 설치된 인권센터나 징계위원회도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것이 대학원생들의 인식이다. 인권센터는 적은 비정규직 인력이 과중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으며, 징계위원회는 대부분 다른 교수나 외부 변호사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정욱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지부장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처럼 대학 내에서 일하고 있는 대학원생(조교·연구원·학회 간사·대학 강사)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교내 징계위원회를 피해자 관점과 위치를 반영할 수 있는 학생위원이나 외부 인권전문가로 구성하는 등 징계절차를 개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