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에 울게 될 줄은 몰랐다. 듣지 못한다고 가정하고 휴대전화 메모장과 종이, 손짓발짓으로 세상과 소통한 하루는 상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했다. 예기치 못한 친절에 감동했고, 미묘한 불쾌함을 느끼기도 했다. 무심하게 대해줄 때면 유독 고마웠다. 과하지 않게, 똑같다는 듯이 바라볼 때 말이다. 다행히 체험 기간 만난 10명은 대부분 그랬다.
청각장애인이 돼보겠다고 결심한 건 2월 말이다. SNS에서 청각장애 대학생의 글을 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면서 입모양을 볼 수 없어 소통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고충도 있구나, 한동안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미안함을 느꼈다.
그로부터 한참 뒤, ‘청각장애인 체험’을 결심해놓고도 꽤 오랫동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지난 23일 서울 영등포구수어통역센터에서 수어통역사 김모씨와 대화를 나눈 뒤에야 용기가 났다. 김씨는 체험하는 동안 말도 안 해볼 것을 권유했다. 그의 조언대로 24일 ‘말 없는 하루’를 보냈다. 마스크를 내려달라고 요청하거나, 필담을 시도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귀마개는 착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 어떤 소리에도 반응하지 않고, 시각과 촉각에만 의지하려 노력했다.
“저 외국인 아니에요”
오전 7시20분. 심호흡을 네 번쯤 하고 있었다. 메모장에 ‘상봉역으로 가주세요’라고 적힌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였다. 빈 택시가 또 지나갔다. 더 지체할 수 없어 차도 쪽으로 팔을 휘휘 흔들었다. 택시 한 대가 멈췄다. 이제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과 부딪히는 게 이날 목표였다. 평소 출근길과 달리 택시를 2번이나 탈 수 있는 경로를 택했다. 뒷좌석에 타자마자 기사님을 향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뭐야.” 당황한 기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들리는 설정이었으니, 못 들은 체했다. 그래도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야’ 그 한 마디가 날 무겁게 짓눌렀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휴대전화를 한참 들여다보던 기사님은 택시를 천천히 출발시켰다. 휴대전화를 돌려주며 백미러로 날 살피던 기사님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악의는 없었다. 그저 당황한 듯 보였다. 기사님은 이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열심히 손가락으로 상봉역을 가리킬 뿐이었다.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택시가 멈췄다. 조용히 카드기기를 가리키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두 번째 택시는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에 내려서 탑승했다. 회사까지 도보로 15분 남짓한 거리였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번에도 목적지가 적힌 휴대전화를 보여줬다. 또다시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헬로(Hello)?” 전혀 예상 못 한 반응이었다. 날 외국인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우선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난 소리를 못 듣는 상황이었고, 기사님은 마스크를 끼고 있어 입모양이 안 보였다. 기사님이 영어로 말을 거는지, 말을 걸기는 한 건지도 몰라야 했다. 내가 침묵하자 덩달아 말을 멈춘 기사님은 잠시 뒤 또 영어를 쏟아냈다. “스탑 히어?(stop here)” “오케이(Okay)” “땡큐(Thank you)” 기사님의 말에 맞춰 고개를 세 번 끄덕인 뒤 내리면서 어쩌면 청각장애인은 돌발 상황에서 택시기사의 선택지에 들지도 못할 만큼 소외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거 아니잖아요”
점심시간 홀로 찾은 여의도 IFC몰은 ‘소리의 집합체’였다. 안 들으려고 노력하니 외려 온갖 소리가 귀에 꽂혔다. 사람들의 말소리, 발소리 등이 공간을 윙윙 맴돌았다. 그 속에서 혼자가 된 것 같았다. 햄버거 가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침울한 기분으로 휴대전화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다. ‘입모양을 볼 수 있게 마스크를 내리거나, 적어서 말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대기줄 맨 첫 자리. 직원이 나를 바라보며 “몇 분이세요?”라고 물어봤다. 말할 때 얼굴 근육이 움직이니 마스크가 들썩일 줄 알았는데, 미동도 없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말하는 줄도 몰랐을 것 같았다. 휴대전화를 내민 뒤에는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당황한 표정, 멈칫대는 손동작…. 직원은 곧 평온한 표정으로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드시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숟가락질을 흉내 내는 듯한 동작은 덤이었다.
점심식사 후 올리브영과 카페에 갔다. 두 곳의 직원 모두 매장 방침상 마스크를 내릴 수 없어 필담 또는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올리브영 직원이 종이에 또박또박 ‘포인트 적립하세요?’라고 적는 동안 다음 차례 손님이 신경 쓰여 식은땀이 났다. 카페 직원이 손짓으로 원두를 설명할 때는 빨리 끝나기만 바랐다. 퇴근길 내내 고민하다가 겨우 들어간 서브웨이 매장에서는 주문을 시작하자마자 후회했다. 빵부터 치즈, 채소, 소스까지 모두 골라야 했다. 휴대전화를 바쁘게 주고받았다. 직원이 인상을 찌푸릴 때마다 초조해졌다. 그래도 마스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주문을 끝까지 받아주는 그들의 모습은 위로가 됐다.
가장 힘겨운 것은 퇴근 후 미용실에 갔을 때였다. 앞머리를 자르고, 뿌리염색을 하는 게 스스로 정한 ‘미션’이었다. 요청사항을 적어 휴대전화를 보여주니 미용사 3명이 나란히 붙어 화면을 들여다 봤다. 그중 한 명이 밝은 목소리로 “네”라며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모른다. 그가 내 담당 미용사가 됐다. 한지은(29)씨였다. 한씨는 메모지에 앞머리 길이는 어느 정도가 좋은지 등을 적어가며 세세히 내 의사를 확인했다.
나중에 한씨에게 사실을 털어놓은 뒤, 마스크를 벗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물어봤다. 청각장애인 고객을 종종 만난다는 한씨는 “나는 괜찮지만 다른 손님이 꺼릴까 봐 마스크를 벗을 수는 없었다”며 “대신 필담으로라도 고객의 의사를 정확히 파악하려 했다”고 말했다. 불편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그런 건 딱히 없었다”고 했다. 문득 아침에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업무 중 들른 회사 앞 카페의 사장, 배환희(30)씨가 한 말이었다. 배씨에게도 체험 중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생각을 물어봤었다. 바쁜데 적어서 주문받는 게 불편하지 않았냐고. 배씨의 대답은 ‘쿨’했다. “아이고. 그거 얼마나 걸린다고요. 별거 아닌데요.”
체험 기간 내 감정은 자주 오르락내리락했다. 상대가 이 ‘새로운 대화방식’을 귀찮아하는 것 같으면 가슴이 뜨끔했고, 친절하게 대해주면 눈물이 났다. 콜택시 앱이나 키오스크 매장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렇게 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누리는 것을 청각장애인도 똑같이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피할 수 없었다. 새로운 방식에는 적응하면 그만이었다. 배씨 말대로 별거 아니니까.
작은 배려만 있다면…
나는 하루짜리 체험이어서 운이 좋은 거였다. 적어도 답답하다며 짜증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김 통역사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불쾌한 상황을 종종 겪었다고 한다. 최근 중고물품 거래를 할 때도 그랬다. 사전에 메시지로 의견을 다 조율했는데, 만남 장소에서 판매자가 가격을 착각했다. 뭔가 말하는 그에게 “청각장애인이라서 들을 수 없으니 입모양을 볼 수 있게 배려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대신 휴대전화 메모장으로 필요한 말을 주고받았다. 김 통역사는 “화를 내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예민한 표정과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며 “짜증을 내거나 표정이 일그러지는 분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청각장애인은 의사소통 과정에서 상대의 입모양, 표정 등을 읽는 게 중요하다. 수어만으로는 대화의 내용을 100% 이해하기 어렵다. 얼굴에 나타나는 감정의 강약을 파악하는 것도 대화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마스크 때문에 얼굴의 절반이 가려지니, 세상과의 연결통로가 절반쯤 닫혀버린 게 됐다.
입 부분이 투명하게 제작된 ‘립 뷰 마스크’를 쓰면 도움이 될까. 김 통역사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장애를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김 통역사는 “전 국민이 다 함께 쓰면 모르지만 일부만 사용하는 것은 꺼려진다”며 “사람들이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대신 작은 배려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김 통역사는 “감염 우려나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점은 잘 알고 있다. 청각장애인도 코로나19가 무섭다”면서 “짜증을 내지 않고 조금만 이해하며 휴대전화로 대화하는 방법 등 차별 없는 분위기를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또 “가끔 안 들린다고 하면 더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다고 들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해볼lab]은 ‘해볼까?’라는 말에 ‘실험실’이라는 뜻의 ‘lab’을 조합해 만든 단어입니다. 국민일보 기자들이 직접 체험해보고, 그 감상을 솔직히 담았습니다.
글·사진=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