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대남 군사행동계획 보류’ 선언이 나온 지 하루 만에 여당에서 대북제재 완화와 한·미 워킹그룹 무력화, 종전선언 추진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다. 북측이 ‘후속조치에 따라 향후 대남전략이 바뀔 수도 있다’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공을 넘긴 데 따른 것이다. 우리 정부도 대북전단살포금지법 등 남북관계를 유연하게 이끌만한 당근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대북제재를 비핵화 협상 지렛대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입장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뾰족한 대책 수립은 어려운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이 25일 먼저 대북제재 완화와 종전선언 재추진 필요성을 주장하며 포문을 열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송영길 민주당 의원은 MBC라디오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 위원들을 만나 인도적 지원 등에 대해 제재의 일부 완화를 강력히 요청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송 의원은 대북제재 사안을 논의하는 한·미 워킹그룹에 대해선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자주적인 통일정책, 통일부가 모든 것을 워킹그룹에 의존해서 미국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이런 형태가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도 “북·미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이 추진되다가 아쉽게 무산됐다”며 “대한민국의 한반도 운전자 역할을 더 강화해 당사국이 참여하는 종전선언을 다시 추진해야 한다. 국회에서도 뒷받침하는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민주당과 열린민주당, 정의당 등 범여권 소속 의원 173명은 지난 15일 ‘한반도 종전선언 촉구 결의안’을 발의한 바 있다. 하지만 다음날인 16일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전격 폭파하자, 민주당은 “당론이 아니었다”며 거리두기를 해왔다. 김 위원장의 대남 군사행동 계획 보류 결정이 나오자마자 다시 종전선언 카드를 꺼낸 것이다.
정세현 민주평와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과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정 수석부의장은 국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강연에서 “외교부가 한·미 워킹그룹이 생겼다고 말했을 때 ‘족쇄를 찼다’고 생각했다”며 “(남북 간 긴장 국면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것을) 4·27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가는 계기로 삼으며 한·미 워킹그룹 틀 밖에서 족쇄를 풀고 핵문제를 풀기 위해 중재자·촉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 특보는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북한이 대남 군사행동 계획을 보류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긴장 국면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유엔 대북제재에 저촉되지 않고 북한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식료품과 의약품 지원, 중국 등 제3국을 경유한 대북 개별관광을 들었다. 특히 문 특보는 “미국이 반대한다고 해서 우리가 (대북지원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다. (한·미) 동맹은 쌍방의 국익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일부와 외교부 등 남북 관계 주무부처들도 서둘러 움직이고 있다. 통일부는 김 위원장의 대남 군사행동 보류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며 남북 관계를 개선하는 데 힘쓰겠다는 뜻을 밝혔다. 실제로 통일부는 대북 개별관광에 필요한 사전 준비작업을 90% 이상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초 문 대통령이 개별관광으로 꽉 막힌 남북 관계를 풀어보겠다고 공언한 만큼 코로나19 상황이 개선되는 대로 관련 논의를 북한과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조세영 외교부 제1차관은 24일(현지시간)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C) 주최 한·미 전략포럼에서 “한국인들은 이제는 현재의 정전 체제를 끝내고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한국이 우리 스스로의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는 데 있어 주인공이 될 때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관건은 미국의 호응 여부다. 미국은 대북제재 문제와 종전선언 등을 북·미 양자 간 비핵화 협상의 중요한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미국을 설득하지 않고 우리 정부가 독자적으로 남북 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할 경우 우리 기업들이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탓에 미국과의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손재호 신재희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