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감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국적 냉동화물선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가운데 검역·항만 당국이 이런 위험성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정황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러시아 국내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한 지난 4월 중순 이후에도 손을 놓고 있던 당국이 사태가 터진 뒤 뒷북 대응에 나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무도 몰랐던 부산항 이태원발 소동
24일 국민일보가 입수한 해양수산부 비공개 공문을 보면 지난달 15일 한국인 선원 A씨가 부산신항에 정박한 배에서 코로나19 의심 증상을 보였다. 당국 조사 결과 A씨는 서울 이태원클럽을 다녀온 사실이 밝혀졌고, 같은 배에 탄 나머지 선원 16명(한국인 7명·필리핀 9명)도 검사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결과는 모두 음성이었지만, 선박이라는 환경 특성상 대형 전파가 불거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당시 항만 당국은 국내 해운선사들에 공문을 보내 ‘이태원클럽 방문 선원’에 관한 긴급실태조사를 진행했다. 부산항과 해운업계가 이태원 방문자를 찾기 위해 이미 한차례 발칵 뒤집힌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국립부산검역소·부산지방해양수산청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동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지난 4~5월에도 부산항에서는 3차례에 걸쳐 의심증상을 보인 외국인 선원들이 나타났다. 지난 4월 28일 국적미상의 선원 1명, 다음날인 29일 필리핀인 2명, 지난달 11일에는 필리핀인 1명에게 코로나19 의심증상이 발현돼 검사가 이뤄졌다. 이중 4월 29일 필리핀인 2명은 결국 확진판정을 받았다. 중국 닝보항에서 출발한 컨테이너선에 탑승했던 선원들이었다.
전날 해수부 관계자는 러시아 선박발 집단감염 사태와 관련해 “확진자가 발생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하역작업이 이루어진 상황을 예기치 못했다. 하역사들과 협의해 매뉴얼이나 추가대책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설명과 달리 부산항에서는 이미 이상징후가 여러 차례 포착된 셈이다.
‘코로나 시한폭탄’ 러 선박, 하루 10척씩 들어왔다
이번 집단 감염은 부산 감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국적 냉동화물선 아이스스트림호(3933t) 선원 21명 중 16명이 지난 22일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으며 불거졌다. 이 배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출항해 지난 21일 오전 감천항에 정박했는데 당국은 ‘이미 하선한 배의 선장이 러시아 현지에서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선박 대리점의 신고를 받고서야 검사를 진행했다. 이후 바로 옆에 정박한 러시아 선박에서도 확진자 1명이 추가됐다.
그동안 검역당국은 러시아 국적 선박에 대해서는 ‘승선검역’ 대신 ‘전자검역’으로 일관했다. 러시아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폭증한데다 문제의 선박은 앞서 중국까지 들렀다가 입항했지만 당국은 배에서 제출한 서류만 믿고 검증은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부산항만공사에 따르면 부산항 전역에는 하루 평균 119척의 화물선이 들어오는데 이 가운데 감천항에 입항하는 러시아 국적 선박은 10∼15척 정도로 파악된다. 이날도 오전 11시 기준으로 11척의 러시아 국적 냉동 화물선이 입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감천항은 부산항 내 다른 항구들과 다르게 러시아 선박이 유일하게 입항하는 곳이다. 현지 코로나19 확산 상황에 맞춰 더욱 엄격한 방역이 요구됐지만, 당국은 러시아의 코로나 상황이 악화된 뒤에도 별도 ‘검역 관리 지역’으로 지정하지 않았다.
정부는 그간 중국, 홍콩, 마카오, 이탈리아, 이란 등에 대해서만 ‘검역 관리 지역’으로 지정해 승선검역을 해왔다. 이 지역을 묶어서 별도 관리하기로 한 것은 지난 3월로, 이후 추가 조치나 변경은 없었다.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감천항이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외국인 선원의 하선이 원칙적으로 금지된 곳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배에서 내리지 않는 한 방역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오판한 것이다. 하지만 하역작업을 하는 국내 노동자들과의 접촉과정에서 문제가 터졌다.
부산항운노조 관계자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부두가 방역에 허술하다는 얘기를 당국에 여러차례 했다”며 “노동자들은 검역소에서 외국 선원들을 잘 관리한다고 믿고 배에 올라 일해왔는데 결국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한탄했다. 이어 “인부 중에 확진자가 나오면 물류가 마비되기에 매일 발열 체크하고, 식당도 폐쇄하는 등 수칙을 지켜왔는데 이런 일이 터져 허탈하다”며 “일감이 끊기게 돼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손태종 질병관리본부 검역지원과 보건연구관은 “지역 검역소에서 항만 등 유관기관에 방역 가이드라인을 주고 안내했지만 소통이 제대로 안 된 부분도 있다”며 “하역 작업의 특성상 노동자들도 마스크 쓰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돌고 있어 제때 업데이트를 해주지 않으면 다 놓치게 된다. 긴급히 ‘검역 관리 지역’으로 지정하고 승선검역을 해야 했다”며 “정부가 (감염이) 발생한 뒤 따라가는 상황이 반복되는데 또 놓치는 곳이 없는지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다음달 1일부터 전세계를 ‘검역 관리 지역’으로 지정해 운용하고, 부산항에 입항하는 모든 러시아 선박에 대해 승선 검역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