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 김여정이 쏟아낸 말폭탄, ‘선역’ 김정은이 주워담았다

입력 2020-06-24 16:52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전격 보류하면서 ‘강 대 강’으로 치닫던 한반도 정세가 당분간 완화 국면으로 접어들 전망이다. ‘악역’을 자처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3주 동안 몰아쳐온 대남 공세를 오빠인 김 위원장이 수습한 모양새가 됐다. 김 위원장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군사분계선(MDL) 일대 대남 확성기가 철거되고 북한 매체에 게재됐던 대남 비난 기사가 삭제되는 등 후속 조치가 일사불란하게 뒤따랐다.

김 위원장은 이번 조치에 따라 대남정책에서 ‘선역’ 이미지를 더욱 굳힐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여동생 김 제1부부장이 지난 4일 담화를 시작으로 대남 공세를 시작한 이후 보름 넘게 잠행을 이어왔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3일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주재한 이후 한 달 가까이 남북관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 7일 김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당 정치국 회의에서는 경제 문제만 논의됐을 뿐 대남정책은 다뤄지지 않았다.

북한 당국의 후속 조치도 즉각적으로 이뤄졌다. 북한군은 지난 21일부터 최전방 지역에 설치했던 대남 확성기를 사흘 만에 다시 철거 중이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24일 국회 업무보고에서 “(확성기 철거를) 여러 군데서 했기 때문에 현재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북한 대외선전매체가 이날 새벽 올렸던 대남 비난은 일제히 삭제됐고, 노동신문 등 북한 주민들에게 공개되는 지면 매체에도 대남 비난 기사가 전혀 실리지 않았다.


북한이 예고했던 대남전단 살포도 함께 보류될 것으로 보인다. 비무장지대(DMZ) 감시초소(GP) 인근의 북한군 병력 움직임, 해안포 포문 개방 등 그간 포착됐던 군사적 동향도 잦아들 가능성이 있다. 다만 김 위원장의 대남 군사행동계획 보류와 그에 따른 조치들이 9·19 군사합의 이행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하기는 이르다는 시각이 많다.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을 포함해 북한이 전면 단절한 연락채널이 복구될지도 미지수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보류 결정이 어떤 요인에 따른 것인지 분명치 않아 섣불리 예단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섣불리 반응을 내기보다는 북한이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배경을 면밀히 분석하며 상황을 관리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아직 입장이 없다”거나 “지켜보자”며 말을 아꼈다.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도 “북측 보도를 면밀하고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으며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정부 내부에서는 개성 남북공동사무소 폭파 이후 악화일로로 치닫던 한반도 정세가 완화되자 안도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여권 일각에서는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을 둘러싼 논란이 북한의 태도 변화와 관련됐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볼턴 전 보좌관의 회고록이 뜻하지 않게 문재인 대통령의 북·미 대화 주선 노력을 재조명함으로써 북한의 긍정적 반응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북한 외교관 출신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은 자료를 내고 우리 측의 대북방송 재개 방침이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태 의원은 “북한 대남 확성기 재설치에 대응해 우리 군이 대북 확성기들을 복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히자마자 김정은이 군사행동을 보류한다고 했다”면서 “대북방송이 무섭긴 한가 보다”고 말했다.




조성은 임성수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