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보호 우선” 성범죄 수사 새 기준 만드는 검찰

입력 2020-06-23 16:53

검찰이 성범죄 수사에서 가해자 처벌 못지않게 피해자 보호에 주력하고 있다. 이른바 ‘박사방’ 사건 수사팀은 성착취 영상물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잘라내기’ 압수수색을 처음 실시했다. 검찰에서는 피해자 보호를 우선하는 성범죄 수사 경향이 새 기준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 태스크포스(팀장 유현정 부장검사)는 성착취 영상물과 관련해 잘라내기 압수수색 방식을 영장 청구서에 적시하고 있다. 클라우드(인터넷 개인용 서버)에서 영상물을 복제해 압수하되 업체 협조를 받아 원본은 삭제하는 것이다.

기존에 클라우드에 저장된 성착취 영상물은 복제 방식으로만 압수했다. 이후 클라우드 영상을 삭제하려면 피의자 동의를 받아 지우거나 판결 확정 후 법원을 통해 강제집행해야 했다. 만약 피의자가 클라우드 계정 비밀번호를 까먹었다며 모르쇠로 나올 경우 영상 삭제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영상이 계속 남아있다며 2차 피해를 호소하는 일이 잦았다. 실제 성범죄 가해자가 출소 후 클라우드 영상으로 또 범행을 저지르는 사례도 있었다. 검찰 관계자는 “기존에는 일단 증거수집에 집중했기 때문에 수사기관에서 클라우드 영상이 남아있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수사팀은 이런 관행을 깨보자는 취지에서 압수수색 방법을 바꿨다. 압수수색 영장 청구서에 잘라내기 방식을 적시하고 법원에 필요성을 강조했다. 애초에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물은 소지가 금지돼 있는 만큼 압수와 동시에 삭제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법원도 필요성을 받아들여 영장을 발부했다. 검찰은 해외 클라우드 업체의 성착취 영상물들을 곧바로 삭제했고 추가 압수수색도 진행할 계획이다. 경찰에도 앞으로 이런 식으로 영장을 신청하라고 지휘했다.

검찰에서는 잘라내기 압수수색이 성범죄뿐만 아니라 기업 비밀 유출 등 디지털 증거 관련 수사에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박사방 수사팀은 피해자들의 성명과 주민등록번호 변경 절차도 지원하고 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는 처음 이뤄졌다. 검찰이 피해자에게 국선전담 변호사를 선정해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현재까지 피해자 15명 가량이 지원받았다. 검찰 관계자는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 보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데 수사팀 내부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대검찰청 인권위원회에서도 불법 동영상으로 2차 피해가 예상될 때 검찰이 피해자 의사 확인 전에도 신속하게 영상을 차단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법조계에서도 검찰의 변화가 긍정적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최진녕 법무법인 이경 대표변호사는 “지금까지 검찰 과학수사는 공소사실의 입증에 매몰된 측면이 있었다”며 “잘라내기 압수수색은 유죄 증거를 모으면서 동시에 피해자 보호 효과도 거둘 수 있는 일석이조의 향상된 수사기법”이라고 평가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