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정박 러 선박…사실상 무방비 상태

입력 2020-06-23 14:25
부산소방본부 제공

“확진자가 나온 러시아 선박 위에서 마스크를 한 작업자는 10명 중 1명에 불과했습니다. 코로나19에 무방비 상태였다고 보면 됩니다.”

부산 감천항에 입항해 하역 작업을 하던 러시아 선원이 대거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방역당국의 대응에 비상이 걸렸다. 러시아 선원들이 부산에 하선하지는 않았지만, 작업을 위해 승선한 부산항운노조 하역 노동자들과 접촉해 2·3차 전파에 따른 확진자 발생이 우려된다. 러시아 선박의 부산항 입항 과정에서 검역당국의 검역이 허술했고 신고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정황도 드러나는 등 항만 방역의 ‘구멍’이 확인된 만큼 이에 대한 대책 마련도 시급한 상황이다.

23일 국립부산검역소와 부산시 등에 따르면 전날 오후 부산 감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국적 냉동 화물선인 A호(3933t) 승선원 21명 중 선장 등 16명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나머지 5명은 음성 판정을 받고 선박 내에 대기 중이다.

화물선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출항해 지난 19일 부산항에 입항해 대기하다가 21일 오전 8시쯤 감천항에 정박했다. 냉동선이 정박하자 부산항운노조 소속 노동자들이 승선해 22일까지 이틀간 하역작업을 진행했다. 문제는 이들이 작업 중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으며 거리 두기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러시아 선원들도 10~20% 정도만 마스크를 착용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선박 위는 물론이고 냉동 어류를 보관하는 어창 안에서도 러시아 선원과 국내 작업자들은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너비 1∼2m 정도인 선박 통로를 수시로 지나치며 밀접 접촉했다.

배 밖 부두에서 하역 화물을 점검하던 한국 화물 검수사도 러시아 선원과 수시로 접촉했다. 바로 옆에 정박한 또 다른 러시아 선박 선원들이 물자·기술 교류를 위해 두 선박을 왕래한 것으로 확인돼 러시아 선원의 추가 감염이 우려된다.

아쉬운 점은 부산항 검역 과정에서도 나왔다. A호가 부산항 입항 전 검역 당국에 A호의 선장이 일주일 전 발열 등 코로나19 유사 증상을 보여 하선한 점을 미리 알리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검역 당국은 A호 검역 과정에서 검역관이 직접 승선해 검사하는 ‘승선 검역’ 대신 전산으로 서류를 받아 검토하는 전자 검역을 시행했다. A호 측은 선원 발열 증상이나 러시아 현지에서 발열 증세를 보여 하선한 선장 등에 대해 전혀 신고하지 않았다. 검역 당국은 A호 측의 형식적인 신고 내용만 믿고 검역증을 내줬고 부산항운노조원이 배에 올라 하역작업을 했다.

부산소방본부 제공

부산시 보건당국에 따르면 러시아 확진자 16명과 밀접 접촉한 사람은 부산항운노조원 61명이다. A호 인근에 정박한 러시아 국적 냉동 화물선 B호를 오간 수리공 6명, 도선사, 화물 검수사, 하역업체 관계자, 수산물 품질관리원 소속 공무원 등 27명이 2차 접촉자로 분류된다.

시는 밀접 접촉자 92명 전원을 자가격리하고 코로나19 진단 검사를 할 예정이다. 우선 두 선박을 오간 선박 수리공 6명에 대한 검사를 진행한다. 작업에 참여한 항운노동자 63명은 우선 자율격리 하고 검사 결과에 따라 후속 조치를 진행한다. B호에 있는 선원 21명에 대해서도 이날 중 진단 검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A호 러시아 선원 확진자 16명은 이날 오후 부산소방재난본부의 25인승 구급 버스를 이용해 부산의료원으로 이송, 곧바로 치료를 시작할 예정이다.

부산=윤일선 기자 news828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