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여전히 포로 수두룩…南서 잊혀지고 있어”
“북에서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나라와 가족을 지키겠다고 전쟁 나갔다가 잡힌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다 못 돌아왔어요. 남쪽에서는 잊힌 사람들입니다. 북에는 아직도 이런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합니다.”
소설가 황석영은 1993년 출간된 그의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에서 1980년대 말 북한 평양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북한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당시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로부터 1년 뒤 국군포로 조창호 중위가 탈북해 귀환했다. 그가 증언한 국군포로의 실상은 처참했다. 황석영씨가 평범한 평양 사람들의 삶을 서술하던 그때, 국군포로들은 탄광에서 사람답지 못하게 살고 있었다.
나진철(92·가명)씨도 탄광에서 살았던 포로 중 한명이다. 그는 6·25전쟁 정전협정을 보름 앞둔 1953년 7월 강원도의 한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가 됐다. 북에 억류돼 탄광에서 40년 이상 강제노동을 하다 2004년 여름 우여곡절 끝에 탈북했다. 51년 만에 고향 땅을 다시 밟았을 때는 76살이었다. 나씨는 22일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아직 북한에 남아 있을 국군포로를 언급하며 이들을 ‘잊힌 사람들’이라고 했다. 국민일보는 나씨 가족이 북에 있는 점을 감안해 인물을 특정할 수 있는 부분은 적시하지 않기로 했다.
나씨는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돼 언론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잊힌 사람들이 다시 기억되기를 바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씨는 강원도 삼척에서 큰아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박격포 찾으러 갔다가 잃어버린 50년
강원도 출신인 나씨는 23살이던 1950년 수도사단 소속으로 6·25전쟁에 뛰어들었다. 아내와 아이 셋을 두고 전장으로 떠났다. 막내가 태어난 지 1주일이 채 안 됐을 때였다.
나씨 특기는 박격포였다. 치열했던 전투 도중 무전이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후퇴하고 있었다. 나씨는 “박격포를 놓고 온 게 생각나 다시 고지로 갔다가 중공군에 붙잡혔다”고 했다. 나씨는 한 달가량 억류됐다 평안북도의 한 광산으로 끌려갔다. 철광석을 캐며 사상교육을 받았다.
그 다음엔 지붕도 없는 기차 화물칸에 실려 함경북도 탄광으로 보내졌다. 200명가량 되는 다른 국군포로들과 함께였다. 나씨는 “그 탄광은 정말 열악했다. 하루 3교대로 40년 넘게 일했다”며 “할당량을 채우려면 늘 시간이 모자랐다. 아침에 들어갔다가 할당량을 채우면 밤 12시였다”고 했다.
그가 일하던 막장은 높이가 1m도 되지 않았다. 갱도는 툭하면 무너졌고 가스 폭발도 다반사였다. 많은 국군포로들이 목숨을 잃었다. 나씨는 “탄광에서 수십 번 죽을 뻔했다. 숙소에 돌아오면 머리가 너무 아파 김칫국을 마시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고 말했다.
북의 사상교육은 끝이 없었다. 눈을 잠시 붙인 뒤엔 매일 아침 사상교육을 받았다. 국군포로 송환협정에 따라 일부 포로 송환이 이뤄진 것도 몰랐다. 그때는 ‘이러다 죽겠구나’ 생각만 했다.
북한 당국은 국군포로들에게 결혼시켜 자식을 낳게 했다.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도록 한 것이다. 나씨는 “난 장가 안 간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계속된 막장 일에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그는 “주변에서 ‘그래도 장가가면 누가 챙겨주기라도 한다’고 해 결국 장가를 가게 됐다”고 했다. 그는 북에서도 아이들을 얻었다. 터를 잡았지만 국군포로의 가족들은 여전히 차별을 받았다. 자식들은 중학교 졸업 뒤 대부분 탄광에 보내졌다. 나씨의 북쪽 아들도 탄광에서 일했다.
나씨는 2000년대 초반 이산가족 상봉에 나와 남쪽의 큰아들을 만났다. 나씨는 “내가 탄광 일을 잘하는 축에 속해 국군포로인데도 가족 상봉에 보내줬던 것 같다”며 “상봉하고오니 보위부가 매일 도망갔는지 확인하고 감시했다”고 말했다. 평생을 탄광에서 일했는데도 북의 감시는 끝나지 않았다. 나씨는 “70대였지만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더라도 남쪽으로 가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2004년 여름 다른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이른 아침 부인과 함께 집을 나섰다.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갔다. 나씨는 “두만강 너머 제방을 건널 때 경사가 엄청나 ‘떨어지면 죽겠구나’ 했다”고 했다. 나씨 부부는 일주일간 숨어 있다 여러사람들 도움으로 지린성에서 비행기를 타고 남녘 땅에 들어왔다. 북한 땅을 떠난 지 9일 만이었다.
금강산에서 만난 아들 보려 탈북…76세 나이에 두만강을 건너
남쪽 가족이 없었다면 나씨는 76살에 고향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큰아들 성진(76·가명)씨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이산가족 상봉 때 처음 알았다. 아들 성진씨는 2000년 한 국군포로를 만나 아버지의 생존 사실을 들었다. 성진씨는 “믿기지 않았지만 그 분에게 아버지 성함을 얘기하니 바로 ‘강원도 사람인데?’라고 하더라. 아버지를 탈북시키려 3차례나 시도했지만 아버지가 거부했다”고 했다. 이어 “포기한 상태였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고, 극적으로 뵙게 됐다”고 말했다.
나씨는 처음에 남쪽 아들이 주선한 탈북을 보위부의 공작으로 의심해 거부했다. 나씨는 “하루는 누가 찾아와 ‘(남쪽에서) 연락이 있었다. 같이 가자’고 했다”며 “내 신분이 국군포로여서 보위부에서 떠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의심이 돼 선뜻 따라 나서지 못했다”고 말했다.
성진씨는 금강산에서 아버지를 만났을 때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고 회고했다. 그는 “1953년 7월 아버지의 전사통지문을 받고 그날을 기일로 삼아 매년 제사를 올렸다”며 “그런 아버지가 살아 있으니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했다.
나씨는 헤어질 당시 7살이던 남쪽 아들에게 “어머니 이름이 뭐니”라고 물었다. 나이 든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머니 이름을 들은 나씨는 그제서야 “옳구나”라고 외쳤다. 그는 “가슴이 먹먹했다. 우리 집안이 문을 닫지 않고 살아 남았구나. 남쪽에 있는 부인이 정말 고생했겠구나. 우리 막내는 얼마나 컸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담담하게 털어놨다.
탈북해 귀환한 국군포로는 1994년 조창호 중위를 포함해 80명이다. 올해 1월 기준 이들 중 23명만 생존해 있다. 평균 나이는 90세를 넘는다. 정부는 2007년 생존 국군포로 560명의 명단을 확보했다. 지금은 이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10년간 귀환한 국군포로는 없다.
문동성 기자, 삼척=손재호 기자 the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