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할 수 없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볼턴의 ‘폭로’

입력 2020-06-23 06:00
남·북·미 정상 간 대화 공개
한때 트럼프 최측근으로 대북 정책 주도
트럼프에 악감정·대북 초강경파 인사의 관점 반영
靑 “편견 바탕으로 사실 왜곡” 선 긋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민낯을 폭로하는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 을 쓴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비판하는 기사.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지난 17일(현지시간) 회고록 발췌본이 공개되자 '워싱턴의 모든 사람들이 볼턴을 싫어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폴리티코 홈페이지 캡처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저격하려고 쓴 회고록이 남·북·미 정상 사이에서 오간 내밀한 얘기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고 있다. 지난 2년간 한반도 정세를 좌우했던 굵직한 이벤트 이면의 대화와 상황을 담고 있어 파장이 적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에 악감정을 가진 대북 초강경파 볼턴의 일방적인 주장을 100%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한때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소설로 치부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 백악관을 배경으로 18일(현지시간) 촬영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의 표지. AP연합뉴스

일단 볼턴에 대한 워싱턴의 평가는 최악이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그가 몸담았던 공화당조차 볼턴을 사람 취급 안 하는 분위기다.

지난 17일(현지시간) 볼턴의 회고록 발췌본이 공개됐을 때 미 언론들은 ‘나라보다 자신을 우선시한 겁쟁이이자 기회주의자’(CNN), ‘가장 중요한 순간에 진실을 말하지 않은 족제비(weasel) 같은 사람’(워싱턴포스트)이라고 맹비난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공화당 인사들은 볼턴을 책으로 돈 벌려고 하는 선정주의자 취급하고, 민주당은 의회에서 증언하지 않고 책으로 폭로한 행위가 애국적이지 않다고 비난한다”며 “워싱턴에 있는 모두가 볼턴을 싫어한다”고 전했다. 볼턴은 지난해 말 트럼프 대통령 탄핵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출석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WP)는 “우리는 미국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는지 머리를 싸매고 몇 년을 괴로워할 것”이라며 “볼턴의 책은 그러한 노력에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누구도 볼턴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2018년 5월 9일(현지시간) 백악관 회의에서 존 볼턴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쳐다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턴이 한때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참모로서 대북 정책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점, 그가 모든 회의를 기록하는 지독한 메모광이라는 점 때문에 책에 담긴 내용을 모두 허무맹랑한 소설이라고 치부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백악관의 피터 나바로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은 21일(현지시간) CNN 방송에 출연해 “볼턴은 고도의 기밀 정보를 방대한 책 전체에 흩뿌려 놨다”며 “그는 국가안보 측면에서 매우 심각한 일을 했고 그에 대해 값을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볼턴은 2018년 4월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다. 연초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에 모처럼 순풍이 돌던 때다. 볼턴의 등판은 북한 입장에선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다. 볼턴은 북핵 해법으로 ‘선(先) 핵폐기 후(後) 보상’을 골자로 한 리비아식 모델을 주장해왔고, 대북 군사 공격도 공공연하게 언급해온 인물이다. 북한이 리비아 모델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북한이 강력 반발하면서 북·미 정상회담이 취소될 뻔한 일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년 2월 28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서 확대 양자회담을 하고 있다.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왼쪽 첫번째)의 맞은 편 자리가 비어 있다. 공식 회담에 카운터파트를 내보내지 않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로 북한의 반감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AP연합뉴스

지난해 2월 ‘노딜’로 끝난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때 볼턴은 양 정상이 참석한 친교 만찬에서 배제됐다. 양국 외교안보라인이 배석한 확대 정상회담에선 볼턴의 맞은편 자리가 비어 있었다. 볼턴에 대한 북한의 반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볼턴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미 국무부 차관을 지냈다.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2006년엔 유엔 주재 미 대사로 있으면서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대북 제재를 주도했다. 북한의 경제 숨통을 조이는 제재가 볼턴의 손에서 시작된 셈이다. 유엔 대사에서 물러난 뒤로는 보수 성향 미국기업연구소(AEI)에서 활동했다.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1일(현지시간) ABC방송에 출연하기 전 회고록에 관한 질문에 답할 것이라며 트위터에 올린 글. 볼턴 전 보좌관 트위터 캡처

볼턴은 트럼프 대통령과 외교정책을 놓고 갈등을 빚다 지난해 9월 경질됐다.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그의 많은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해임 사실을 알렸다. 볼턴은 ‘트윗 해고’ 이후 기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나는 적절한 때에 발언권을 가질 것”이라며 반트럼프 행보를 예고한 바 있다.

청와대는 22일 볼턴의 회고록과 관련해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한·미 정상 간 협의를 자신의 편견을 바탕으로 왜곡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