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북한에 추가 도발을 자제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이 대북 대화에 흥미를 잃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자극하기 위해 11월 미 대선 전 ‘레드라인’에 근접한 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16일(현지시간) 북한 행동에 대한 입장을 묻는 국민일보 질의에 “북한에 역효과를 낳는 추가 행동을 삼갈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남북관계에 대한 한국의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미 국무부는 남북관계 관련 논평에서 항상 ‘비핵화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는데, 이번에는 비핵화 언급이 빠졌다. 한·미동맹은 굳건하다는 원론적인 입장 표명으로 해석된다.
외신들은 북한의 도발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했다. AP통신은 “북한은 핵 외교가 교착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미국과 한국을 압박하는 연출된 분노의 표시로 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북한이 비핵화 외교에 들어선 2018년 이후 가장 도발적인 행동”이라며 “진보적인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 관계 노력에 심각한 차질을 안길 것”이라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북한이 파괴한 남북연락사무소는 “엄밀히 말해 아직 전쟁 중인 남북간 사실상 대사관 역할을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북한의 분노는 한국 정부의 설득에 따라 미국과 비핵화 협상에 나섰음에도 제재 해제에 아무 진전이 없는 데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이 한국을 넘어 미국을 직접 위협하기 위해 핵실험 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감행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벨기에 유럽연구소의 라몬 파체코 파르도 한국석좌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트럼프 대통령은 당분간 북한에 관심이 없음을 보여줬다”며 “나는 11월 미 대선 전 핵실험이나 ICBM 시험발사와 같은 형태의 실질적인 긴장 고조가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을 잡을 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 국익연구소(CNI) 해리 카지아니스 한국담당 국장도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한국전쟁 발발 70주년(6월 25일)과 미국의 독립기념일(7월 4일)이 다가온다”며 “북한이 수개월 동안 위협해왔던 ICBM 시험발사를 할 것 같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핵 협상테이블에 나오기 전 미 본토를 사정권에 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을 잇따라 발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이 넘어서는 안 될 레드라인으로 ‘ICBM에 핵탄두를 탑재해 무기화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거친 언사와 도발에도 계속 침묵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대화 무용론이 불거질 때마다 김 위원장과 주고받은 친서를 공개하거나 그에 대한 개인적 신뢰를 드러내며 반박해왔는데, 올해 들어 북한 문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재선 가도에 북한 문제가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급부상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건강이상설에 다시 불을 지폈다.
WP는 “김 위원장이 아프다는 확실한 증거는 여전히 없지만 그의 건강이 최상의 상태는 아니며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가족과 공유하려 하고 있다는 추측을 낳게 한다”고 전했다. 미 정부의 북한 분석가였던 레이첼 민영 리는 “일련의 북측 조치들은 김여정에 대한 이미지를 1인자의 여동생이 아닌 독립적인 정책 담당자로 바꿔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도 “김여정의 급부상은 김 위원장의 건강에 대한 우려와 연관이 있다”며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본격적으로 아들의 권력 승계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권지혜 이형민 기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