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0억 자산 남겨두고 왔는데…희망 꺾인 개성공단기업인들

입력 2020-06-17 17:27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 비상대책위원장 등 입주기업 대표들이 17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관련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남북 화해의 상징으로 꼽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16일 오후 폭파한 사실이 확인되자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굳어버린 남북관계에도 ‘개성공단은 머지않아 재가동되겠지’라며 기대했던 개성공단기업들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리 정부가 남북간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탓”이라고 질책했다.

개성공단기업협회 비상대책위원회는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비대위는 “남북 양 정부의 약속을 믿고 개성공단에 입주했고, 개성공단 재개 희망을 놓지 않았던 우리 기업인들에게 현 사태의 전개는 억장을 무너지게 한다”며 “더 이상의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남북 양 정부는 전향적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북한이 16일 오후 2시50분쯤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7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캡처

개성공단기업협회에 따르면 개성공단 입주 기업 120여곳이 2016년 2월 철수할 당시 북한에 남겨두고 왔다고 정부에 신고한 자산이 9000억원 수준인 것으로 확인됐다. 철수 당시 북한의 핵실험에 따라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한다는 정부의 발표와 북한의 즉각적인 추방 결정 탓에 남측으로 부랴부랴 넘어온 입주기업들은 직·간접적 피해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한 관계자는 “개성공단에서 만든 제품을 하나도 갖고 나오지 못하면서 그로 인한 손실만 몇백억은 됐다”며 “공장에 쌓인 재고부터 제품을 새로 만드는 데 드는 비용뿐 아니라 기업 이미지도 타격을 입었으니 당시만이 아니라 꾸준히 영향이 있었다”고 전했다.

정기섭 개성공단기업 비상대책위원장(앞줄 왼쪽 두번째)이 1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개성공단기업협회 사무실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대위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우리 정부에 “사태의 발단은 대북 삐라(전단) 살포였지만 그 배경엔 4.27 판문점선언과 9.19 공동선언을 이행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것”이라며 “남북 정상간 공동선언의 이행, 특히 개성공단사업, 금강산관광사업, 철도도로 연결 사업을 과감하게 실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 비대위원장은 “이번 북한의 행위에 우리 정부가 원인을 만든 부분이 있다”며 “이번 정부 들어 남북간 합의 이행이 어느 것 하나 이뤄진 게 없어 북한이 남측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깨지고 분노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단 문제가 하나의 기폭제가 됐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어 북한에는 “개성공단 기업인들은 5년여간 공단 재개를 위해 불철주야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며 “통일민족의 미래를 위해 북측의 대승적인 판단을 간곡히 호소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에도 이번 연락사무소 폭파의 책임이 있음을 강조했다. 비대위는 “미국이 한미워킹그룹을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협력에 대해 사사건건 제동을 건 결과가 현 사태를 야기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며 “미국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의 대화와 협력을 존중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편 비대위는 연락사무소 폭파로 인한 개성공단 내 개별기업의 피해는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김학권 개성공단기업협회 고문은 “북한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연락사무소를 폭파한거지 개별 공장까지는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하고, 또 실제로도 그렇길 희망하고 있다”며 “개성공단 기업인들은 우리 정부가 4.27 판문점선언과 9.19 공동선언을 선제적으로 이행해줬으면 한다”고 촉구했다.

신한용 전 개성공단비대위 위원장은 “상징적인 장소가 무너진 데 대해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며 “더 이상 이런 대립관계가 진행되지 않고 빨리 수습돼서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할 수 있는 평화의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