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가족에게도 숨겼는데… ‘낙인’ 두려운 형제복지원 피해자

입력 2020-06-15 17:14

형제복지원 피해자 이모(55)씨는 15일 “가족들에게 여태까지 피해자임을 숨겼는데 알려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아 두렵다”고 토로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통과 이후 이씨는 기쁘면서도 무서웠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되면 가족들에게 자신이 피해자인 걸 말해야 할 상황이 올 것 같아서다. 이씨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진 않을까 걱정하며 매일 밤잠을 설친다”며 괴로워했다.

과거사법 개정안이 지난달 20일 통과되면서 형제복지원·선감학원·서산개척단 등 수십년간 묻혀있던 국가 조장·방임 사건들의 진상규명 길이 열렸다. 다만 피해자들 중엔 이제 평범한 직장인이나 한 가정의 가장이 돼 세상에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다. 피해 사실이 공개된 뒤 주변의 달라진 시선과 가족들이 느낄 고통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동시에 피해자란 낙인을 찍지 않는 사회 분위기 형성과 피해자 보호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이씨는 자신이 형제복지원 피해자인 게 알려질까 두려워 이름도 바꿨다고 한다. 2013년 과거사법 개정안이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그는 2014년 개명했다. 명단 혹은 자료에서 본인의 이름이 발견돼 형제복지원 피해자인 게 가족과 지인에게 알려지진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이씨는 “피해자란 사실을 알린 뒤 ‘아내가 사기 결혼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두 자녀가 나와 같은 트라우마를 갖게 되면 어떡하나’ 등의 생각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 말고도 평범하게 사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연락이 끊겼다”며 “피해자란 사실이 밝혀지는 게 두려워서 일 것”이라고 전했다.

과거를 알리는 게 두려운 건 이씨 뿐만이 아니다. 김영배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은 “6년 전 선감학원 문제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가족들에게 처음 이야기를 했다”며 “피해자라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해서 오랜 시간 말을 못했었다”고 기억했다. 김 회장은 “처음에 가족도 충격을 받았지만 후에 딸 아이가 ‘강제적으로 당한 건데 아버지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고 말하더라”고 회고했다.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자모임 대표도 “피해자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가족이나 지인에게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며 “신고센터에도 몰래 와서 피해 사실을 말하는 이들이 다수”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피해자임을 숨기고 싶어하는 피해자를 위한 보호책을 만들고 피해자의 탓을 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대표는 “피해자의 잘못이 절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김용원 변호사는 “수용 경위만큼이나 석방 이후 피해자의 삶도 다양할 것”이라며 “진상규명은 피해사례를 공표하는 문제가 아니며 피해자 유형을 세분화하고 각자 상황에 맞는 명예회복 조치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보현 기자 bob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