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목의 성경 현장] 하나님의 저주를 감당하다…십자가(예루살렘)

입력 2020-06-16 07:30 수정 2020-06-16 07: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사도행전 5:30) 음모를 꾸며가며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던 유대인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이방인들에게 십자가 처형이 육체적 고통을 주는 극형이라면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저주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Christ)’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육체적인 고난으로 조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통해서 육체적인 고난을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형을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징벌 수단으로 사용했던 로마인들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의 웅변가요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십자가 처형이야말로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로마시대 수많은 사람들 즉 살인자, 강도, 해적이나 반란자들이 십자가형을 통하여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 무섭고 잔인한 십자가 처형은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땅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마 군대는 셉포리성(갈릴리 지방에 있는 도시)을 함락한 후 이스라엘 반란군에 가담했던 사람 2000명을 십자가형에 처했으며, 헤이드리안 황제는 이스라엘 반란자들을 하루에 500명씩 십자가에 처형했을 정도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 또한 자칭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십자가 처형에 대하여 고증해 볼 수 있는 증거가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1968년 예루살렘 북쪽 기밧트 하-미브타에서 십자가 처형으로 죽은 신장 167㎝, 나이 26세가량의 남자 유해가 발견되었다. 이 사람의 발꿈치뼈는 못이 박혀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조사결과 이 못은 아카시아 나무 조각에 못질한 다음 발꿈치뼈를 통과하여 올리브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박혔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청년의 아래쪽 다리뼈는 부러졌으며 오른쪽 팔뼈에 못 자국의 흔적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못이 박힌 채 발견된 뼈(왼쪽). 오른쪽 요골에 못이 통과한 흔적(1 A)와 팔에 못이 박힌 위치(2)

이 청년의 뼈에 대하여 의학적으로 면밀히 조사한 결과 우리는 십자가에 사람을 매다는 방법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사람을 십자가를 등지고 서게 한 다음 그의 팔뚝 위쪽에 못을 박고, 그의 다리는 밀어 올려서 굽은 자세가 되도록 한 다음 발뒤꿈치에 못질했던 것이다. 이때 체중은 팔에 실려 팔뚝에 박힌 못은 살을 찢으며 팔목까지 내려와 걸리게 되는데 이 처형이야말로 육체적 고통을 가중시키고 지속시키는 무시무시하면서도 단순한 전형적인 로마식 처형방법이었다. 그러니 로마 사람들은 물론 초대교회 당시 이방인 크리스천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육체적 고통으로 인식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음모를 꾸며가면서까지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어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던 유대인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육체적인 고통으로 예수를 죽이는 것이 유대인들이 십자가 처형을 외쳤던 목적이었는가? 이방인들에게 십자가 처형이 육체적 고통을 주는 극형이라면 유대인의 관점에서 십자가 처형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 형벌에 대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근동지역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 근동지역에서 사람을 나무에 달아 죽이는 처형은 육체적인 고통에 앞서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죽음으로 생각했으며 동시에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온 천하에 알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이 왕을 나무에 매달았으며(수8:29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가나안 땅의 다섯 왕을 죽인 다음 나무에 매달았고(수10:26), 아하수에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모함했던 하만을 나무에 달아 처형했으며(에7: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은 이스라엘의 라기스성을 함락한 후 포로들을 나무에 달아 처형한 장면을 자신의 궁궐에 부조로 새겨놓았던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모습

여기에 더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무에 달려 죽는 형벌을 신의 저주로 인식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21:23)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던 유대인들의 목적은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데 있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예수,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예수를 만드는 것이었다.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하여 이방인의 관점이 아니라 유대인의 관점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었음에도 나무에 달린 주님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불명예스럽고 저주받은 죽음으로 보았다.

앗수르 군인들이 나무에 매달아 처형하는 모습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행5:30)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행10:39)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유대인이었던 바울과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유대인의 관점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벧전2:24)

이제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유대인의 관점으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다시 생각해보자.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던 예수님을 다시 생각해보자. 주님이 고민하고 번민했던 십자가는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참기 어려운 고통은 수치이며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겠는가? 모든 수치와 불명예와 저주를 감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해 본다.

김상목 성경현장연구소장(국민일보 성지순례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