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극장협회 등 영국 공연계와 하원의원들이 보리스 존슨 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위기에 처한 공연산업을 즉각 구제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들은 ‘K-방역’으로 불리는 한국의 방역 체계를 영국 극장가에 도입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공연을 재개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영국 하원의원 158명은 11일(현지시간) 존슨 총리에게 “영국 공연 산업을 구제하는 데 최선을 다해달라”는 취지의 서한을 보냈다. 런던극장협회(Society of London Theatres), 영국극장협회(UK theatre), 영국무용협회(One Dance UK)가 함께 한 서한은 “연간 영국의 극장을 찾는 관객은 3400만명”이라며 “지금 당장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공연 관계자 약 20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고 연말까지 영국 극장 70%가 문을 닫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연간 관객 3400만명은 연간 영국 축구 프리미어리그 관객 1450만명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치다.
영국 공연계와 하원의원들은 ‘K방역’을 영국 극장가에 도입해 공연 재개를 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발열 체크, 문진표 작성, 마스크 착용, 손세정제 비치 등 ‘K방역’ 토대의 정부 지침은 모두 수용할 수 있지만 극장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공연장 내 거리두기가 자칫 공연 산업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크기 때문이다.
앞서 뮤지컬계의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 역시 “한국의 선례를 도입해야 한다. 철저한 방역이 뒷받침된다면 공연이 가능하다는 것을 한국이 보여줬다”며 “다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가면서 공연을 올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지그재그 좌석제로는 전체 객석의 50%만 팔 수 있는 만큼 수익을 낼 수 없어 공연장과 예술단체 모두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된다. 영국 외에 최근 공연장 운영을 재개하기 시작한 다른 나라 공연계에서도 거리두기 좌석제는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로이드 웨버의 제안으로 영국 문화부는 지난 3일 한국 문화부와 화상회의를 통해 K방역 노하우를 공유했다. 다우든 장관은 “한국의 효율적인 코로나19 대응 정책을 전 세계에서 우러러보고 있다”며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공연이 안전하게 진행되는 비법을 물었다. 이에 대해 박양우 장관은 방역과 공연장 내 거리두기에 대해 설명했지만 현재 한국에서 공연중인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은 공연장 내 거리두기를 실시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공연장 내 거리두기는 공공 의존도가 높은 국공립극장은 따르지만 민간극장은 권고사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공연장 내 거리두기는 공연장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도입한 것으로 객석과 무대 모두 해당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감염 예방을 위한 권고 수칙으로 국가마다 그 기준이 조금씩 다르다. 중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은 1m, 독일 이탈리아 등은 1.5m, 미국은 1.8m, 영국 스페인 캐나다는 2m다. 한국은 2m를 기준으로 하되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최소 1m 이상을 권고하고 있다. 다만 한국에서 공연장 내 거리두긴는 2m가 아니라 관객의 앞, 뒤, 양옆 좌석을 비우는 ‘지그재그 좌석제’를 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체 객석의 50%만 판매할 수 있게 된다. 영국의 음악가 노조나 오케스트라들 역시 2m 규정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며 1m로 낮춰달라고 정부에 요구한 바 있다. 또한 오케스트라에서 현악은 1m도 뗄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공연장 내 거리두기는 객석만이 아니라 무대 위에도 해당된다. 예를 들어 독일 오케스트라 협회는 연주자 간 간격을 1.5~2m 유지하되 비말이 튀기 쉬운 가수나 관악기 연주자는 3m 이상 간격을 두라고 권고했다. 이 규정을 적용할 경우 무대에 50명 정도만 출연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실내악이나 하이든, 모차르트 등의 소편성 교향곡은 가능하지만 말러같은 대편성 교향곡은 원곡대로 연주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주자가 빽빽하게 앉아야 하는 오케스트라 피트의 사용이 불가능해 현재 유럽에서 오페라, 발레, 뮤지컬 등은 공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다만 5월부터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무관중 온라인 중계로 조심스럽게 활동이 시작됐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난 5일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로는 처음으로 코로나19 이후 대면 연주를 시작했다. 다만 빈 필은 연주자 간 거리를 오스트리아의 사회적 거리두기 기준인 1m로 설정했다. 또한 연주자 책임을 전제로 상황에 따라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연하게 적용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빈필은 대편성인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 등을 공연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무대 위 거리두기는 고려되지 않았으나 서울시향이 지난달 29일 엄격한 독일식 기준을 받아들여 연주자 간 1.5m를 뗀 온라인 콘서트를 처음 선보였다. 통상 단원 100여명이 오르던 무대였지만 이날은 50명도 채 못 올랐다. 이후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도 무관중 온라인 공연을 선보이면서 무대 위 거리두기 지침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프로그램을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공연계와 의원들은 공연장 내 사회적 거리두기가 오히려 공연계를 위축시키고 공연 산업을 저해할 요소로 판단했다.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한국식 방역 체계를 도입하면 안전한 환경에서 공연을 재개할 수 있는 만큼 기약 없이 닫고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다. 앞서 세계적인 뮤지컬 프로듀서 카메론 맥킨토시 등 공연계 관계자들은 올해 안에는 공연이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하원의원 158명이 모여 한목소리를 낼 만큼 영국 공연 산업이 국가 경제 미치는 기여도는 엄청나다. 영국 공연계는 최근 정부에 긴급 구제 금융을 요청했다. 극장들의 세금 감면이나 코로나19 같은 예기치 못한 새로운 위험 상황에 대비한 보험 등을 검토해달라는 내용이 핵심이다. 현재 영국의 극장들은 3개월여간 문을 열지 못해 수익이 없는 상황에서도 막대한 고정비용을 감당하고 있다. 현지 외신에 따르면 모든 극장이 한 달에 내는 경비는 평균 7만~10만 파운드(1억~1억5000만원)다. 하원의원 등이 발송한 이번 서한은 공연 산업의 안정성을 지켜달라는 호소로 풀이된다.
이들은 서한에 “영국의 공연 산업은 단순 여가생활 차원이 아니다”라며 “모든 정규 교육과정과 연결돼 있고, 국민적 정서에 밀접한 산업이며, 공연계 선두에서 세계로 수출되는 콘텐츠인 만큼 총리의 즉각적인 조치를 요청한다”고 썼다. 앞서 매킨토시는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공연은 반드시 재개된다”며 “다만 그 전에 정부의 구제가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