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남이 써준 연설문을 그냥 읽는다. 자기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지적한 것과 관련해 신동호 청와대 연설비서관이 11일 ‘시(詩)’로 답을 했다.
신동호 청와대 연설비서관은 11일 페이스북에 기형도 시인의 ‘빈집’을 차용한 ‘빈 꽃밭’이라는 시를 게재했다.
신 비서관은 “어느 날 아이가 꽃을 꺾자 일군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며 “아이는 더 많은 꽃을 꺾었고 급기야 자기 마음속 꽃을 꺾어버리고 말았다”고 남겼다. 이어 기형도 시인의 ‘빈 집’ 첫 구절인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를 “꽃을 잃고, 나는 운다”로 바꾸고 “꽃을 피워야할 당신이 꽃을 꺾고 나는 운다, 헛된 공부여 잘 가거라”라고 덧붙였다. 여기서 ‘아이’와 ‘당신’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 비서관은 “통념을 깨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부조화도, 때론 추한 것도 우리들의 것이었다”며 “숭고를 향해 걷는 길에 당신은 결국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지만 꽃을 잃고, 우리는 울지 않는다”고 적었다. 진 전 교수의 최근 행보와 막말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정부는 꾸준히 갈 길을 가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통령 연설문은 대통령 비서실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다듬어지지만 초안은 신 비서관 손에서 시작된다.
신 비서관은 강원고 3학년이던 1984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 ‘오래된 이야기’로 등단한 시인이다. 지금까지 ‘저물 무렵’ ‘꽃분이의 손에서 온기를 느낀다’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서호(西湖)’ 등의 시집을 냈다. 신 비서관과 문 대통령의 인연은 2012년 대선 때부터였다. 문 대통령이 2015년 2월 더불어민주당 전신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취임한 이후로는 비서실 부실장으로 메시지 특보 역할을 맡았다.
신 비서관은 평소 자신의 페이스북에 시와 글을 올리며 현안과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우회적으로 표현해왔다. 앞서 신 비서관은 지난 2월 진 전 교수가 문재인 정부와 여당, 지지자를 비판하자 ’파국을 걱정하며’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고 “역사는 진보한다고 하지만, 반드시 진보해야 한다는 생각은 역사의 모든 역동성을 단순화시킨 결과”라며 “작은 승리를 큰 승리로 착각한 자들에 의해 파국이 시작된다”고 진 전 교수를 지적한 바 있다.
여권 내부에선 진 전 교수의 막말에 대해 신 비서관이 품격있게 대응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 여권 관계자는 “진 전 교수의 워딩 하나하나에 무리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다. 진 전 교수가 막말 전략으로 나온다면 더 품위있게, 고차원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대통령과 함께 밤을 새며 연설을 준비하는 신 비서관이 진 전 교수에게 한 방 먹였다”고 분석했다.
한편 진 전 교수도 신 비서관의 글을 패러디하며 반박했다. 진 전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에 ‘빈 똥밭-신동호의 빈 꽃밭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진 전 교수는 “어느날 아이가 똥을 치우자 일군의 파리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이는 더 많은 똥을 치웠고 급기야 그들 마음 속의 똥을 치워버리고 말았다”며 “똥을 잃은 그가 운다. 출세 하나를 위해 기와집으로 기어들어 간 예술혼이여 맘껏 슬퍼해라”라고 남겼다. 이어 “같이 쌀 줄 알았던 아이가 똥을 치우니 그가 운다, 몹쓸 공부는 잘 가라며”라며 “똥냄새 나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추한 똥도, 때론 설사 똥도 그들의 것이었다”라고 덧붙였다.
진 전 교수는 “청결을 향해 걷는 길에 아이는 결국 청소하다가 지쳐 주저앉았지만 똥을 잃고도, 파리들은 울지 않는다. 똥 쌀 놈은 많다며 울지 않는다”며 “아이는 문득 기형도가 불쌍해졌다”고 마무리했다. 신 비서관을 포함해 현 정부와 여권 인사들을 싸잡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음은 두 시의 전문.
◆빈 꽃밭
- 기형도의 빈집을 기리며
(어느 날 아이가 꽃을 꺾자
일군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아이는 더 많은 꽃을 꺾었고
급기야 자기 마음속 꽃을 꺾어버리고 말았다)
꽃을 잃고, 나는 운다
문자향이여 안녕,
그림은 그림일 뿐, 너를 위해 비워둔 여백들아
도자기 하나를 위해 가마로 기어들어 간
예술혼이여 맘껏 슬퍼해라
꽃을 피워야할 당신이 꽃을 꺾고
나는 운다, 헛된 공부여 잘 가거라
즐거움(樂)에 풀(艸)을 붙여 약(藥)을 만든
가엾은 내 사랑 꽃밭 서성이고
울고 웃다가, 웃다가 울고 마는 우리들아
통념을 깨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부조화도, 때론 추한 것도 우리들의 것이었다
숭고를 향해 걷는 길에 당신은
결국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지만
꽃을 잃고, 우리는 울지 않는다.
-신동호
◆빈 똥밭
-신동호의 빈꽃밭을 기리며
어느날 아이가 똥을 치우자
일군의 파리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이는 더 많은 똥을 치웠고
급기야 그들 마음 속의 똥을 치워버리고 말았다.
똥을 잃은 그가 운다
똥냄새여 안녕,
그림은 그림일 뿐, 너를 위해 비워둔 여백들이여
출세 하나를 위해 기와집으로 기어들어 간
예술혼이여 맘껏 슬퍼해라
같이 쌀 줄 알았던 아이가 똥을 치우니
그가 운다, 몹쓸 공부는 잘 가라며
쌀(米)을 바꿔(異) 똥(糞)을 만든
가엾은 네 사랑 똥밭 서성이고
울고 웃다가, 웃다가 울고 마는 파리들아
똥냄새 나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추한 똥도, 때론 설사 똥도 그들의 것이었다
청결을 향해 걷는 길에 아이는
결국 청소하다가 지쳐 주저앉았지만
똥을 잃고도, 파리들은 울지 않는다.
똥 쌀 놈은 많다며 울지 않는다.
아이는 문득 기형도가 불쌍해졌다.
-진중권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