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그림부터 보자. 전남 해남에 있는 구멍가게 ‘우리슈퍼’를 화폭에 담았다. 노란 장판을 덧댄 평상이나 빨간 우체통이 정겹게 느껴진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건 가게 뒷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 첨언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라일락 품종은 ‘미스김 라일락’이다. 1947년 미국의 한 식물학자가 북한산에서 라일락을 채집해 고국으로 돌아간 게 이 품종이 유명해진 계기가 됐다. ‘미스김 라일락’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당시 이 일을 돕던 직원의 성이 김(金)이었기 때문. 라일락의 꽃말은 ‘젊은 날의 추억’인데, 나이깨나 있는 독자라면 저 그림을 보면서 젊은 날의 추억이나 먼 옛날의 기억을 되새겨볼 수도 있겠다.
평범한 삶을 살았다 말하는 사람도 마음 깊숙한 곳엔 인생사가 남긴 흉터 한두 개쯤은 있기 마련이다. ‘우리슈퍼’ 주인아주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저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 딸과 아들은 학창시절 가게에 친구들을 잔뜩 데려와 군것질거리를 나눠 주곤 했다고, 그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고, 똑똑했던 큰딸은 서울 사범대에 합격했는데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참척의 슬픔을 걸머지고 버틴 세월이 30년이 넘는다고…. 아주머니는 인터뷰를 마치고 가게를 나서려는 저자한테 차가운 캔커피를 쥐여주었다. 저자는 ‘우리슈퍼’를 다룬 챕터 끄트머리에 이런 글을 적어놓았다. “그 많던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온데간데없고 봄 햇살에 라일락 향기만 가득했습니다.”
구멍가게를 통해 들여다보는 추억의 구멍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를 소개하려면 저자의 이력부터 살펴야 한다. 이미경(50)은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97년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경기도 광주 퇴촌면으로 이사를 했는데 동네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구멍가게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그는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한국의 구멍가게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 첫 결과물이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2017). 뭉근한 감동을 자아낸 이 책은 예상을 뛰어넘는 관심을 끌었다. 영국 BBC를 비롯한 해외 매체에서 주목한 화제작이 됐고, 프랑스 대만 일본에서도 번역·출간됐다.
‘구멍가게, 오늘도…’는 전작의 감동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반색할 만한 신간이다. 이미경이 2017년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한국의 구멍가게와 시골의 아름다운 풍광이 담긴 작품 80여점이 실려 있다. 그림만큼이나 아늑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글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지금이야 편의점이 도시의 등대 같은 역할을 하지만 과거엔 구멍가게가 동네의 사랑방이었다. 세월의 파도에 휩쓸려 구멍가게는 하나둘 사라지고 있지만 여전히 “장승처럼 때로는 정자나무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는 곳도 수두룩하다. 저자는 어떤 가게에선 “선사시대 벽화처럼” 벽지를 가득 채운 거래처 전화번호들을, 또 다른 가게에선 “나무로 만든 오래된 돈 통”을 마주한다.
개발의 광풍을 맞닥뜨린 가게의 사연이나, 독특한 스토리를 품은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목도 흥미롭다. 전남 목포 ‘온금수퍼’를 다룬 글이 그런 경우다. 바다를 굽어보는 위치에 자리한 이 동네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었다. ‘조금’은 조수(潮水)가 가장 낮은 때를 이르는 말로 어부들이 출어를 포기하는 시기다. 어부들은 조금 때가 되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이때를 시작으로 동네 아낙네들의 배는 점점 불러오곤 했다.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김선태의 시 ‘조금새끼’를 소개한다.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
“세계의 구멍가게들 그리고 싶어”
이미경은 펜촉에 아크릴 잉크를 찍어서 그림을 그린다. 그림 한 점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최소 2주 정도. 하지만 한 작품을 1년 가까이 붙들고 있을 때도 있다. 이미경은 국민일보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세월에 풍화된 가게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내 그림 세계의 근간은 인간 사이의 정이나 세월이 스며들어 있는 것들”이라며 “이런 ‘테마’에 어울리는 것이 구멍가게여서 구멍가게를 계속 그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구멍가게, 오늘도…’는 독자를 향한 보답의 선물이기도 하다. 이미경은 “비로소 숙제를 끝낸 것 같다”며 웃었다. “독자들한테 느낀 감사함을 어떻게 돌려드릴지 많이 고민했어요. 이제야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요. 앞으로는 세계의 구멍가게들을 그려보고 싶어요.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해외에 나갈 수 없으니 언제쯤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미경은 자신의 작품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유를 묻자 “사람들이 잊고 살던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고 답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흥건한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아련한 향수에 젖게 된다. 중년 독자라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구멍가게, 오늘도…’는 고담준론을 늘어놓는 학술서나 교양서에 비한다면 별것 아닌 책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따뜻한 그림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들을 읽는다면 누구나 속절없이 머릿속 추억의 페이지를 더듬게 될 것이다.
“어릴 땐 하루가 길었습니다. 어떤 날의 기억은 지금도 촘촘하고 생생합니다. …요즘은 무거운 시간을 끌고 언덕을 오르다 맨 위에 다다른 뒤 막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시간에 떠밀려 내려가는 듯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어진 하루는 같을 텐데, 그 많았던 시간이 어디로 갔을까요.”
“골목은 마을의 긴 복도이자 서로의 집 앞마당이었습니다. …(골목의) 소란함은 ‘○○야, 저녁 먹어라’ 부르는 소리에 언제 그랬냐는 듯 대문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비닐봉다리 하나 손에 들고 집으로 향하는 아버지는 골목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한숨을 내쉬고 하루 고단함을 털어냅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