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북한과의 연락 채널 다시 복원될 것…잘못은 우리에게 있어”

입력 2020-06-10 13:10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10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회고록 '판문점의 협상가'를 소개하고 있다. 창비 제공

“북한과의 연락 채널은 다시 연결될 겁니다. 전화선을 가위로 잘라버린 게 아니라 그냥 안 받은 거잖아요. 남쪽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면 (연락 채널은) 다시 살아날 거예요.”

정세현(75)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10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전날 남북 간 연락 채널을 끊어버린 것과 관련된 질문이 나왔을 때 내놓은 답변이었다. 정 부의장은 “북한은 ‘삐라’(대북 전단) 살포를 구실로 삼고 있는데, 그 배경엔 결여된 대남(對南) 자신감이 있다”며 “자신감 부족이 극렬한 적대감 표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일부 언론에서는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화를 내니 (한국 정부가) 벌벌 긴다는 식으로 보도하던데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번 일은 대북 전단 살포를 하지 않기로 했던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며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미국에 사사건건 허락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도 당부했다.

간담회는 정 부의장이 출간한 회고록 ‘판문점의 협상가’(창비)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정 부의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북 전문가로 청와대 통일비서관, 통일부 차관, 통일부 장관 등을 지냈다. ‘북한과 마주한 40년’이라는 부제가 붙은 회고록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인터뷰어로 나선 대담집 형태를 띠고 있다.



정 부의장은 “원래는 중국 외교와 관련된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1977년 국토통일원(통일부의 전신)에 취직하면서 통일 문제가 일생의 업이 돼버렸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어 “최진희의 노래 ‘사랑의 미로’ 가사처럼 끝도 시작도 없는 아득한 통일의 미로를 걸어왔다”며 “어떻게 하면 이 미로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책을 통해) 정리해본 것”이라고 소개했다.

정 부의장은 남북문제 개선을 위해 북핵 문제를 선결 과제로 내걸어선 안 된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그는 “핵 문제와 연결하지만 않으면 남북 관계는 당장 내일이라도 진전될 수 있다”고 말했다. 통일 가능성에 관해선 “지금처럼 남북 간 경제력 격차가 큰 상황에서 살림을 합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북한 경제가 좋아져서 (남북 간 경제력) 격차가 2대 1 수준은 돼야 통일을 고민해볼 수 있다”며 “문제는 그런 상황이 올 때까지 어떤 형태로 살아야 하는가인데, 답은 유럽연합과 같은 ‘연합’ 형태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 부의장의 철학이 담긴 뾰족한 주장은 책에도 한가득 담겨 있다. 그는 “이제는 우리도 ‘큰 나라’가 시키는 대로 따르던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남북관계가 안정되지 못하는 이유가 미국 탓인지, 북핵 때문인지 묻는 말엔 이런 답변을 내놓는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무기시장으로서 남한이 지닌 가치가 운명적 원인이 되었다고 봐야죠.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이라는 노랫말처럼, 미국은 북핵 문제를 빌미로 ‘붙을 듯이 붙을 듯이 붙지 못하는’ 관계로 남북관계를 관리해나가면서 재미를 보고 있어요.”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